편집자의 책 소개
“투명하거나 부드러운 것, 희미하거나 사라짐에 가까운 상태를 물질이라 부를 수 있을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어루만질 수 있을까? 『부드러운 재료』는 만져지지 않은 것들의 물성을 기록하기 위해 그것들을 다시 본다. 저자는 단 한 겹의 설명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것들을 위한 추상, 어떤 영구함을 지켜주는 딱 그만큼의 추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 소리그림 북토크 안내글
“관람자로서 내가 마주하는 것들을 재료 삼아 부드러운 입구를 만들고 무엇이든 될 수 있음을 향해 나아가는 글쓰기.” 입구는 부드럽다. 많은 경우 입구가 출구를 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재료들은 언제나 완성이라는 지점을 향해 움직이는 것 같지만 그곳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르며 그곳은 언제든지 바뀌거나 사라질 수 있는 곳, 가변성이라는 성질 자체로 존재하는 ‘것’에 가까운 무엇이다.
이 책은 사진, 그림, 조각, 영화, 전시, 퍼포먼스, 책, 그리고 온갖 곳에 흩뿌려진 말과 글을 재료 삼아 만들어졌다. 서간문, 가상의 인터뷰, 시, 주석을 출발 삼은 글, 전체 글을 재료로 한 글 등 다양한 형식을 취한다. 글에서는 그밖에 잠과 꿈과 창문과 유리와 소리(음악)와 눈과 비와 얼굴과 빛 등이 주요하게 등장하고 재료로 다루어진다. 그중 어떤 글은 격렬한 사랑의 기록이기도 하고, 어떤 글은 가라앉은 슬픔의 기록이기도 하다. 특히 「미만의 미정」, 「두려움과 함께 보기」, 「소진되지 않은 덩어리」, 「표면을 뒤집으며 떠다니기」는 좀더 눈여겨보았으면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재료들, 책의 저자가 불러낸 재료들은 아래와 같다.
ㆍ김유자·박보마·이나하·함혜경의 단체전 《Summerspace》,
ㆍ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개인전 《Double》(2012)의 일환으로 서울 시내 곳곳의 전광판에 설치된 작품 〈무제〉 중 태평로빌딩과 명동 신세계백화점 맞은편 중앙우체국 설치물, 2023년 5월에 본 같은 장소의 풍경, 그리고 이승훈의 시 「10년」,
ㆍ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블루〉와 〈에메랄드〉, 데릭 저먼의 〈블루〉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필름앤비디오 상영관’이라는 공간,
ㆍ볼프강 틸만스의 전시 《To look without fear》 중에서 사진 〈Wake〉, 이민휘의 앨범 《미래의 고향》, 존 애시버리의 시 「How to Continue」,
ㆍ샬롯 웰스의 〈애프터썬〉,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 로이스 파티뇨의 〈삼사라)의 각각 한 장면,
ㆍ조이 레너드의 〈Strange Fruit〉와 그가 이 작업에 관해 작성한 문서,
ㆍ줄리 머레투의 SFMOMA 커미션 작업 〈HOWL, eon(I, II)〉과 하이디 부허 회고전 《하이디 부허: 공간은 피막, 피부》,
ㆍ이미래의 〈같이 있고 싶다고〉,
ㆍ《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 노실의 천사》에서 본 권진규의 조각 〈도모〉,
ㆍ《젊은모색 2023: 미술관을 위한 주석》,
ㆍ앤 카슨의 『플로트』,
ㆍ오희원 개인전 《Rays blooming》,
ㆍ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 기획 전시 《무브망 - 조각의 선》 등.
전시, 영화, 사진, 조각, 책, 공간 등 물질로서의 재료들은 더 이상 문서 작성 당시의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그것들은 그곳에 없다. 하지만 그것들을 재료 삼아 작성된 각각의 글이 존재한다. 독자들은 그것들을 재료 삼아 자기만의 부드러운 사유, 부드러운 글을 써볼 수도 있겠다.
“책을 쓰는 동안 재료의 부드러움은 물성에 대한 형용사가 아니라 재료라는 범주 자체의 성질에 대한 형용사라는 사실을 다시 알게 되었다. 그 부드러움이 ‘재료’라는 말이 가진 기호로서의 테두리마저 헝클어뜨린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재료라는 범주 자체를 물성과 무관하게 부드럽게 유동하는 성질의 것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재료는 어떤 결과물을 위해 준비된 물질이라기보다 어떤 결과물도 향하지 않는 물질이다. 그러다 문득 어떤 형상을 이루고, 형상인 채로 다시 재료가 되는 물질이다. 종이라는 물질, 책이라는 사물 위에 잠시 고정된 배치를 갖게 된 이 책의 언어들처럼. 이 책 역시 다시 재료가 될 것이며, 이미 재료이기도 하다.” - 「나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