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주의의 역사: 인민주의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
2024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의 트럼프 후보가 민주당의 해리스 후보를 제치고 정권을 탈환했다. 트럼프의 재선은 2007-09년 금융위기와 그로 인한 2차 대불황의 위기 속에서 미국도 자유주의적 합의가 위기에 빠지고 민주정이 인민정으로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아가 트럼프의 재선과 함께 전후 국제질서의 재편도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이 전통적 먼로주의로 복귀하는 동시에 2차 세계전쟁 이후 수행해온 ‘세계경찰’ 역할에서 퇴각할 가능성이 점차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사태 전개는 영국 헤게모니의 위기 속에서 대불황이 전개되고 파시즘이 대두했던 1930년대의 상황을 연상시킨다.
트럼프 정부 1기와 바이든 정부를 거치면서 미국ㆍ영연방ㆍ일본ㆍ유럽연합 등 자유민주정과 중국ㆍ러시아 등 권위독재정의 경쟁은 본격화되었다. 미ㆍ중 ‘전략적 경쟁’과 함께 ‘경제안보’와 ‘국가안보’의 결합이 심화되는 와중에 유라시아주의에 입각해서 러시아제국을 건설하려는 푸틴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면적 침공을 감행했다. 그 뒤를 이어 이란과 이스라엘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북한-중국-러시아-이란 블록은 강화되었다. 급기야 러시아와 북한의 새로운 안보협정이 체결되면서 북한군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했다.
2차 세계전쟁 이후 미국이 주도해온 국제주의를 공격하고 대신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의 재선은 북-중-러-이란 블록에 우호적인 조건을 만들 가능성이 아주 크다. 우선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의 안보에 대한 관여를 축소할 수 있다. 유럽과 아시아의 동맹국들의 ‘무임승차’를 비난해온 트럼프는 동맹에 대한 거래적 접근에 기초해서 방위비용 분담의 증액을 요구할 것이다. 특히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북-러와 타협하고 이란과 적대하면서 중국과의 경쟁에 몰두하는 전략으로 귀결될 수 있다.
이와 함께 권위독재정에 대항해서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방어할 수 있는 동지적(like-minded) 국가들간의 협력은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특히 유럽과 아시아에서 지역안보와 관련된 ‘자력갱생’(self-reliance)의 필요성은 커지고 있는 것이다. 남한은 굴종적 평화를 좇아 북ㆍ중ㆍ러ㆍ이란을 추종할 것인지, 아니면 일본ㆍ영연방 등과 함께 미국을 견인하면서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옹호할 것인지의 선택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천연구실은 마르크스주의가 자유주의와 동맹을 형성했던 1930년대 반파시즘 인민전선의 경험을 환기하면서 북-중-러 등 권위독재정을 추종하는 인민주의에 대항할 ‘국민전선’을 제안한 바 있다. 이 같은 문제의식의 연장선에서 본서에 실린 글들은 자유주의의 역사를 분석한 주요 저작들을 검토하면서 ‘인민주의의 공포’에 대항할 수 있는 정치이념 조건을 탐색한다.
유주형의 글은 케이헌의 「공포로부터의 자유」에 기초하여 자유주의가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중심으로 4단계에 거쳐 진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분석한다. 계몽주의 시대에 종교적 광신과 전제정의 공포에 대항했던 ‘프로토자유주의’는 이후 혁명과 반혁명, 빈곤, 전체주의(히틀러주의/스탈린주의), 인민주의의 공포에 대항하면서 진화했다. 특히 이 글은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유, 도덕이라는 세 가지 지주를 모두 갖추고 있었던 19세기의 ‘눈부신 자유주의’에 주목하면서 인민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정치적 자유 및 경제적 자유와 함께 도덕이라는 지주를 되살릴 필요성을 옹호한다.
박상현의 글은 울로크의 「자유주의 온건파와 급진파」 및 「매콜리와 계몽주의」에 기초하여 계몽주의에서 자유주의로의 이행과정을 분석한다. 자유주의의 사상적 기원은 ‘장기18세기’ 계몽주의 시대로 소급될 수 있고, 특히 계몽주의의 급진적 이념들은 후대에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실현된다는 것이다. 특히 이 글은 애덤 스미스로 대표되는 영국의 경제학적 계몽주의와 루소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철학적 계몽주의를 비교하면서 전자가 19세기 영국의 ‘눈부신 자유주의’의 토대가 되었다면 후자는 ‘종교전쟁적 정치문화’ 속에서 혁명과 반혁명의 악순환으로 귀결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김태훈의 글은 아블라스터가 「서구 자유주의의 융성과 쇠퇴」에서 제시한 자유주의의 통사를 요약하고 케이헌과 울로크의 관점에서 쟁점을 제기한다. 프랑스혁명을 자유주의의 절정으로 간주하는 아블라스터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혼동한다. 또 19세기 영국의 ‘눈부신 자유주의’의 대표자로 간주되는 매콜리가 아니라 프랑스 철학자들을 추종한 벤섬을 19세기 자유주의의 전형으로 간주한다. 1980년대 신보수주의의 집권을 배경으로 집필된 이 책은 자유주의의 지양으로서 사회주의라는 마르크스적 관점을 견지하면서도 현실사회주의의 붕괴가 요구하는 사회주의에 대한 자기비판은 결여한다.
이태훈의 글은 2007-09년 금융위기 이후 자유주의의 위기를 배경으로 집필된 포셋의 「자유주의」의 논지를 요약하고 쟁점을 제기한다. 그는 19세기 초에 확립된 ‘정치관행’으로서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의 타협을 통해 20세기에 성숙기에 이르렀지만 21세기에 강경우파의 등장으로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19세기 자유주의의 표준으로서 영국의 ‘눈부신 자유주의’ 대신 프랑스의 공화주의에 주목한다. 또 민주주의를 정치제도가 아니라 정치이념으로 간주하고 자유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제안함으로써 인민주의 비판에 무력하게 된다.
송인주의 글은 포셋의 3부작 중에서 「자유주의」에 이어지는 두 번째 작품인 「보수주의」를 중심으로 보수주의가 어떻게 자유주의의 경쟁자인 동시에 협력자가 되었는가를 고찰한다. 여기서도 19세기 영국의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와 프랑스 및 독일의 ‘비자유자유주의적 보수주의’가 구별된다. 오랜 역사를 통해 획득된 자유라는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버크의 사상은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의 원천이 된다. 19세기 영국의 헤게모니와 20세기 미국의 헤게모니는 이와 같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합의, 즉 ‘런던 컨센서스’와 ‘워싱턴 컨센서스’에 기초했던 것이다.
부록으로 실린 윤소영의 「대선 불복 ‘20년동란’」은 「‘대선불복 2년동란’」의 후속작으로 2024년 4ㆍ10총선 이후의 정세를 분석한다. 동시에 케이헌, 울로크, 로젠블랫, 로스의 저작을 기초로 자유주의적 이념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프랑스 이데올로기’에 대한 재론은 위고의 「레 미제라블」과 발자크의 「골동품 진열실」 및 「사기꾼」을 비교하면서 ‘촛불혁명’이라고 불려왔던 ‘대선 불복’이 2022년이 아니라 2008년에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질의와 응답에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푸틴의 역사관을 설명하는 동시에 인류의 미래에 대한 토비 오드 등의 논의를 소개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마르크스주의가 인민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이론적ㆍ이념적 자원을 결여하고 있고, 심지어 스탈린주의와 마오주의로 인해 인민주의로부터의 오염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인식에 기초해서, 자유주의의 역사, 나아가 계몽주의의 역사에서 인민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자원을 발견하고자 시도한다.
무엇보다도 명예혁명 이후 영국에서 확립된 신체 및 정신의 자유와 그것을 보장하는 기본권은 소유권에 기초한 자유주의와 노동권에 기초한 사회주의가 공유하는 ‘인류보편적 가치’로 옹호될 수 있다. 나아가 스미스로 대표되는 경제학적 계몽주의와 자유주의는 루소로 대표되는 철학적 계몽주의와 공화주의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또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뿐만 아니라 도덕이라는 지주를 갖고 있었던 19세기의 ‘눈부신 자유주의’에서 인민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가 발견될 수 있다.
이처럼 계몽주의의 역사와 자유주의의 역사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해 마르크스주의 안에 잔존하는 인민주의적 요소들에 대한 자기비판을 가능케 하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적 혁명의 표준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급진화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인식할 수 있다는 선입견과 단절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물론이고 자유주의 역시 취약한 남한에서 인민주의가 상징하는 폭력적 정치문화를 청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윤석열 대통령이 인민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국민전선을 포기하는 대신 어설프게 군부독재를 모방하여 비상계엄을 선포하려던 경악스러운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표준과 함께 자유주의의 표준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더욱 심화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군부독재는 물론이고 인민주의에 대한 대안은 역시 국민전선이고, 남한의 현정세는 군부독재와의 투쟁 경력을 내세워 그보다 더 악질적인 인민주의를 주창하려는 프로토파시스트와의 투쟁을 시급하게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4년 12월
박상현ㆍ유주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