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와 내면의 심리를 세밀하고 격렬하게 탐구하는
지금까지 집필된 가장 지적이고 섬세한 누아르
20세기 최고의 여성 문학가 엘리자베스 보엔의 대표작 국내 초역
〈가장 지적인 누아르〉라는 찬사를 받는 작품이자, 20세기 영국 문학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엘리자베스 보엔의 대표작 『한낮의 열기』가 영문학자 정연희 씨의 번역으로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다. 엘리자베스 보엔은 20세기 초반 영국의 여성 작가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재능을 인정받으며 비평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은 작가로, 1958년 노벨 문학상 후보, 1970년 부커상 후보에 올랐으며 1972년 부커상 심사 위원으로도 참여했다. 사후 그에 관한 전기가 출간되며, 지금까지도 특유의 문학사적 위치와 영향이 꾸준히 연구되고 있는 보엔은 언어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 풍성하고 깊은 심미안으로 사물과 풍경을 해부하는 문체, 격동적인 시대 속 여성의 삶과 심리를 속속들이 탐구하는 예리한 지성으로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국내 초역으로 선보이는 『한낮의 열기』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런던의 풍경과 분위기, 사람들의 요동치는 관계와 내면의 심리를 가장 잘 묘사한 작품으로 발표되자마자 문단과 대중의 뜨거운 주목과 찬사를 받았다. 이 소설은 전시를 배경으로 주인공 스텔라와 스파이로 의심받는 연인 로버트, 이들을 추적하는 정보 요원 해리슨이라는 세 인물 간의 긴장감 흐르는 관계를 따라간다. 안개 같은 모호함이 휘감은 전쟁의 시간 속에서 유령처럼 부유하는 인물들의 감정과 심리를 섬세하게 파고들며, 전쟁이 삶에 새긴 균열을 탁월하게 그려 낸 이 책은 스릴러가 섞인 누아르적 전개가 돋보이는 독특한 전쟁 소설이다. 〈모호하면서도 투명한〉 문체를 구사하는 보엔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이 우리에게 남긴 상흔, 〈뜯겨 나간 감각〉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내면을 심도 있게 탐구한다. 이 작품은 돌이킬 수 없이 지나가 버린 시대에 바치는 비가이자,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방식에 질문을 던지는 명작으로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스릴러 장르와 누아르 형식을 정교하게 엮어
의심과 사랑, 배신과 상처, 불안과 긴장이 서린 인간의 내면을 비추다
1942년 9월의 여름, 전쟁이 한창 중인 런던, 우아한 지성을 지닌 매력적인 부인 스텔라는 일찍이 남편과 사별한 뒤 불안정하게 거주지를 옮겨 다닌다. 그녀는 약 2년 전부터 덩케르크에서 돌아온 군인 로버트와 연인 관계를 맺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영국의 정보 요원 해리슨은 스텔라의 집을 방문하여 로버트가 독일의 스파이로 의심받고 있다는 비밀을 속삭인다. 해리슨은 침묵의 대가로 스텔라와의 만남을 요구하고 서서히, 스텔라의 삶을 구성해 온 얇은 구조물이 조각조각 부서지기 시작하는데…….
1948년 종전 이후 발표된 이 소설은 보엔이 전쟁 당시 아일랜드 특파원으로서 파견 업무를 맡았던 일과 캐나다 외교관 찰스 리치와 사랑에 빠졌던 강렬한 개인적인 경험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첩보물 장르의 소재를 차용해 스릴러와 누아르적 형식을 엮어, 실내 공간에 존재하는 작은 사물을 묘사할 때조차도 짜릿하고 긴박한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이 작품은 의심과 사랑, 배신과 상처, 불안이 섞인 인간의 내면을 탁월하게 그려 내 독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제공한다.
번뜩이는 언어로 전쟁의 상흔을 그려 낸 걸작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공허와 불안을 직면하는 용기
강력한 시대적인 변화를 겪을 수록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혼란을 느끼게 된다. 『한낮의 열기』는 바로 이 과정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이 마주하게 되는 공허와 불안, 트라우마와 상실에 직면하는 선택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작품을 특징짓는 주요 키워드 중 하나는 〈유령〉 또는 〈심령적〉이라는 단어다. 서문을 쓴 역사학자 로이 포스터는 보엔이 사회적 한계뿐 아니라 심령적인 한계까지도 해체하는 전쟁의 파괴력을 그려 냈다고 표현한다. 주인공 스텔라가 사는 곳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공간이다. 영국의 정보원이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듯한 해리슨은 비밀스럽고 모호하며 유령적이다. 길거리는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경계가 흐려진 듯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해체가 일어나도 회복되지 않〉는다거나, 〈존재가 비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스텔라는 묻는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우린 다음에 어디로 가는 거죠?〉
소설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이 가해진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삶 속에 깊숙이 파고든 미세한 불안함을 포착하며 그 상흔과 충격을 놀랍도록 감각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생사가 혼재하는 세상, 불길하면서도 해방적인 전시의 분위기, 전통적 가치의 하락과 붕괴의 과정,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폭력의 영향을 번뜩이는 언어로 옮겨 내는 이 작품은 우리가 서 있는 곳, 시대에 관한 통찰,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한 끝없는 질문을 던진다. 또한 돌이킬 수 없는 상실과 트라우마를 안은 존재로 살아가며, 공허와 불안을 직면할 강렬한 용기를 시대를 뛰어넘어 독자에게 건넨다.〈모든 것은 어디론가 가고 있다. (……) 사랑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이 그 질문을 의식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외면하고 한 얼굴만 바라보지만, 결국 모든 것과 대면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324면)〈하지만 이 사실을 직시해야 해 - 남겨진 우리는 우리와 관계있는 모든 것이 달처럼 죽어 있는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것.〉(457면)
옮긴이의 한마디
엘리자베스 보엔의 『한낮의 열기』를 읽고 옮기는 과정은 처음부터 거의 끝까지 안개가 자욱하고 포연이 묻은 런던의 거리를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그 안개는 열린 결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걷히는 듯 느껴졌다. 길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 걸음을 옮기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그 막막하고 막연한 느낌을, 우리는 안다. 멈추고 돌이켜 보면 평범했건 고통스러웠건 한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시기가 그랬다. (……) 걷는다고 할 때는 대체로 방향성과 목적지에 대한 의문이 떠오른다. 어느 곳으로? 어느 방향으로? 목적지와 방향성은 비슷해 보여도 엄연히 다른 단어다. 우리가 지각하는 시간은, 그 흐름의 방향성은 느끼되 목적지는 알지 못한다. 시대의 이동이 그러할 것이다. 필연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나고, 그러면 기존의 사회 구조가 강하게 흔들리는데, 그 끝은 혁명 같은 사회 구조의 변화다. 『한낮의 열기』는 그 과정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생각, 선택, 표정, 그리고 사랑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