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색, 계」 *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색, 계」 원작 소설
“또 시계를 쳐다보았다. 종아리에서 나간 스타킹 올이 천천히 위로 올라오듯이 실패했다는 예감이 서늘하게 밀려왔다.”
대학교 극단의 여주인공이었던 왕지아즈는 항일 운동에 뛰어들어 친일파인 ‘이 선생’을 암살하기 위한 미인계의 주인공으로 발탁된다. 그녀는 경계심이 많은 ‘이 선생’에게 다가가기 위해 그 부인의 마음을 사는 등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처음에 동지라 믿었던 이들은 막상 작전이 시작되자 그녀에게 위험한 의무만을 지우고 ‘이 선생’의 정부가 된 그녀를 어색하게 대한다. 드디어 이 년여 간 이어진 첩보 활동에 종지부를 찍는 날. 왕지아즈는 계획대로 ‘이 선생’을 시내의 한 보석상으로 유인하고, 상점 밖에는 무장한 인원들이 대기 중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그녀에게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한 뒤 잠시 생각에 잠기는데, 그의 무방비한 옆얼굴에서 문득 애틋한 감정을 느낀 지아즈가 당황하기 시작한다. 이미 빠졌는가[色], 아니, 끝까지 경계하라[戒]. 그녀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1979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친일파 난징 정부의 관료였던 첫 번째 남편 후란청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썼다. 1940년대에 왕징웨이 친일 정부의 특무부장인 ‘딩모춘’을 국민당 정보원 ‘정핑루’가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그것이다. 나중에 암살 미수 사건을 알게 된 딩모춘의 아내가 정핑루를 살해했다고 전해진다. 소설 「색, 계」는 이 사건을 객관적으로 다루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인물의 감정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항일 구국 운동 같은 거대한 목표가 아니라 사랑〔色〕과 금기〔戒〕 사이에서 방황하는 한 여인의 내면세계에 주목한다는 뜻이다. 한편 영화 「색, 계」는 ‘이 선생’과 ‘왕지아즈’ 사이 주고받는 감정선을 풍성하게 각색했다. 즉 소설 「색, 계」가 한 여성의 내면에서 펼쳐지는, 색과 계의 충돌에 관한 것이라면, 영화는 이를 유혹하는 여성과 경계하는 남성 사이의 긴장으로 재해석했다.
■ 혼란한 시대에 ‘통속 소설’을 쓴다는 것
“충분히 깊이 들어가지 않고 피상적이라고 말한다면 돋을새김 역시 예술이 아니냐고 묻고 싶다.”
-「증오의 굴레」 머리말에서
장아이링은 청대 말부터 신중국이 수립된 1949년 전후의 상하이, 홍콩 등 대도시를 배경으로 평범한 인물들의 삶과 사랑을 섬세한 언어로 파고들었다. 당시 중국 문단에서 국가, 민족, 계급적 이상에 골몰한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던 것과 달리 그는 구시대의 전통,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내면화한 젊은이들이 새 시대의 혼란 속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모순과 갈등을 특유의 우울한 문체로 풀어낸 것이 특징이다. 작가 스스로 ‘내가 쓸 수 있는 수준에서 가장 통속 소설에 가깝게 쓴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증오의 굴레」의 머리말에서는 정치 격동기에 ‘통속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한 세간의 비판을 의식하듯 ‘나는 통속 소설에 관해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애정을 품고 있다.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인물이나 그들의 슬픔과 기쁨, 이별과 만남 때문이다. 충분히 깊이 들어가지 않고 피상적이라고 말한다면 돋을새김 역시 예술이 아니냐고 묻고 싶다’라고 반문한다. 이렇게 보편적인 공감대를 바탕으로 하기에 「색, 계」 외에도 「붉은 장미, 흰 장미」(이 책에 수록), 「경성지련」, 「반생연」 등이 영상화되면서 오늘날까지 독자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 수록 작품 줄거리
「붉은 장미 흰 장미」
“맞아요. 젊고 예뻤을 때는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하든 늘 남자와 마주쳤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나중에는 남자 말고도 다른 게 있었어요…… 결국 다른 게…….”
자수성가한 청년 전바오는 과거 사귀었던 여자친구와 헤어지던 날, 그녀가 자신을 원했음에도 자제력을 발휘하여 그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 후로 그는 이렇게 지켜 주어야 할 ‘순정’의 대상과, 그 반대로 유혹을 당하고, 유혹하는 ‘열정’의 대상을 구분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흰 장미’와 ‘붉은 장미’의 은유가 그의 삶에 뿌리내린다. 어느 날 그는 ‘붉은 장미’ 자오루이를 만났다. 자오루이는 친구의 아내로, 결혼 생활 중에도 남편 몰래 여러 연인을 거느리는 대범하고 자유분방한 여인이다. 전바오는 그녀에게 거의 절망적이라고 할 만큼 빠져 친구마저 저버린 채 밀회를 즐기다가 결정적인 순간, 그녀를 떠나 어머니를 통해 소개받은 옌리와 결혼한다. ‘흰 장미’ 옌리는 순수하고 순종적이라 배우자 감으로는 최고이지만 매력이 전혀 없다. 전바오는 이상적인 결혼을 통해 사회적인 평판을 지켜냈음에 안도하지만, 안정적일 것만 같았던 옌리와의 결혼 생활에서 균열을 감지하기 시작한다.
「정처 없는 발길」
“뤄전은 무거운 트렁크 두 개를 들고 한 걸음씩 쿵쿵 부딪치면서 나아갔다. 마음이 복잡하고 어지러워 걸음마저 휘청거리는 듯했다.”
원제인 ‘부화랑예(浮花浪蕊)’는 평범한 화초라는 뜻과 함께 정처 없이 떠도는 유랑자라는 의미도 지닌다. 상하이의 영국 회사에서 비서로 일했던 뤄전은 광저우를 거쳐 홍콩으로 들어갔다가 일본행 선박에 오른다. 옆 선실의 리처드슨 부부를 만나면서 뤄전은 지난 삶을 되짚어 보고 언니 부부의 친구인 패니를 떠올린다. 영국과 상하이를 거쳐 홍콩으로 옮겨 가면서 점점 중심을 잃고 겉도는 패니, 고향인 상하이는 물론 어느 곳에서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심지어 새로운 땅으로 가면서도 확신하지 못하는 뤄전. 평범한 시민이면서 부평초처럼 떠도는 두 여인의 삶에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향해야 했던 장아이링의 심정과 동양과 서양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던 그녀의 삶이 투영되어 있다.
「봉쇄」
“나중에는 그녀도 결혼하겠지만 남편은 이렇게 우연히 만난 사람처럼 사랑스러울 리 없었다. 봉쇄된 전차에서 만난 사람처럼…….”
장아이링을 첫 번째 남편인 후란청과 맺어 준 작품이다. 잡지에서 우연히 「봉쇄」를 읽은 후란청이 적극적으로 장아이링을 찾아갔고, 이후 두 사람은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워졌다고 한다. 훗날 장아이링은 이 결혼 때문에 친일파로 몰리고 공산당 정부에 잘 적응할 수 없어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소설 속에서 전시의 ‘봉쇄’ 상황에 걸려 통행이 제한되자 전차 승객들은 할 일을 잃고 무료함에 빠진다. 뤼쭝전이 껄끄러운 사람을 피하려고 우추이위안에게 말을 걸면서 두 사람은 급속도로 호감을 느끼고 사랑에 빠졌다고 믿는다. 하지만 봉쇄가 풀리자 한바탕 백일몽이었음을 깨닫고 허탈해한다.
「증오의 굴레」
“그리고 우리 아버지요. 앞으로는 상관하지 마세요. 아버지는 대책이 없는 사람이라 돈을 들여 봐야 헛돈 쓰는 것밖에 안 돼요. 제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젊은 여성 ‘자인’은 대도시 상하이에서 작은 방의 월세를 간신히 대는 처지로, 실직한 뒤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있다. 그러다 친구의 소개를 받아 한 부잣집의 가정교사로 취직한다. 그곳에는 가정부,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 아이의 아버지이자 사업가인 샤쭝위가 살고 있다. 안주인은 건강이 좋지 않아 시골에서 요양 중이다. 어느 날 한밤중에 앓아누운 아이가 가정교사인 자인을 찾자 그렇게 몇 날 며칠 자인이 샤쭝위의 집에서 아이를 간호하면서 두 사람은 한층 가까워진다. 그런데 이들의 미묘한 기류를 먼저 눈치챈 이가 있었으니 바로 자인의 아버지다. 자인의 아버지는 한평생 술에 의지해 살아온 한량으로, 자인의 어머니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재혼한 뒤에도 딸에게 찾아와 뻔뻔하게 술값을 요구한다. 그는 자인에게 샤쭝위와의 관계를 슬쩍 떠보면서 이를 이용하기로 결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