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해설〉
연약함이 오히려 싱싱한, 아이러니 시학 /민용태(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스페인 왕립한림원 위원)
시집 제목이 된 “오늘은 얇다”는 참 평범하면서도 깊고 참신한 이미지이다. “하루가 얇다/그렇게 쉽게 떠날 거면서” 영원을 약속하는 사랑은 덧없고 야속하다. 어차피 떠나야 할 사랑, “오래 유지할 수 없는 이별을 잠깐 소유하듯/내일로 가는 길은 가파르다” 오늘도 얇아서 머물거나 기댈 수 없고 내일은 가파르다. 구태여 로마 호라티우스의 “Carpe diem(오늘을 즐기라)”을 말하랴. 오늘도 내일도 그냥 허망함과 서글픔, 슬픔이 걸려있다.
삶이 팍팍한 사람들은 로또 복권을 산다. 오늘은 좀 뭐가 있으려나. 그러나 내게 돌아오는 것은 기껏해야 “2등, 3등…” 그것도 어디야? 하지만 푸념은 끝이 없다. 시인은 독백처럼 되뇌인다: “그토록 얄팍한 꿈에 번번이 좌절해도/아주 담담히 상처에 붙이는 거다/깎아지른 절벽처럼 풀잎처럼 그렇게”이 마지막 시구는 참으로 아름답다. 좌절의 “상처에 붙이는” 몸짓. “깎아지른 절벽”에 붙은 “풀잎”이 보인다. 두 이미지 다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하는 안타까움, 안간힘뿐. 그러나 그 “얇은 하루를” 반창고처럼 “내일에 붙이며” 우리는 산다.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소리치면서 지는 해를 지켜본다.
장명희 시인은 도시 삶이나 일상을 “도시 식물도감”이라는 연작시로 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처럼 원래 식물이 되고 싶었거나 숲의 나무였는데 빌딩 숲에 살게 되었다. 그래서 “도시에서 지친 나는 빌딩 숲 걷는 것을 즐긴다/가로등 하나 이른 저녁 가지 위에 걸려있다/실망도 기대도 옷걸이 위에 건다”. 지친 하루의 일상을 옷걸이에 거는 소시민의 힘겨운 몸짓이 보인다. 시인은 말한다:
가장 눈부신 검음 또는 어둠
가장 싱그러운 초록 또는 대지의 흙먼지
오늘 움켜쥘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라 해도
그저 욕심 없이 살자
공원 앞 교회 첨탑 사이로 보이는 작은 가로수 길에 너는 서 있다
추위도 물난리도 뿌리로 뿌리로 버티며
속으로 견디며 상처로 아로새긴 무늬를 입고
규정된 몸짓으로는 결코 살고 싶지 않은 너
한 그루 휴식처럼
너는 신호를 기다리는 몇 그루 사이 이제 와 서 있다
시인의 자연 속의 삶의 기억을 “흙먼지”로 뒤집어쓰고 산다. 시인은 말한다: “가장 싱그러운 초록 또는 대지의 흙먼지/오늘 움켜쥘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라 해도” 자연인이던 원초적 소망을 버리자고 다짐한다. “속으로 견디며 상처로 아로새긴 무늬를 입고” 나무의 휴식을 생각한다. 우리 한자의 휴(休)처럼 나무(木)에 기대어 쉬고 있는 사람(人) 되어. 그래서 시인은 “한 그루 휴식처럼/너는 신호를 기다리는 몇 그루 사이 이제 와 서 있다.”고 자신에게 말한다. 도회에 산다는 것은 잠깐 수목원에 사는 것이니까.
시인은 “우린 다 겸직이고 좀처럼 약점을 노출하지 않는다(사고가 아니고서는) 많이 예쁘거나 아플 때는 꽃이나 나무로 쉴 수 있다”라고 말한다. 자연인이고 도시에 사는 것은 “겸직”이니까. 놀지 않고 일하는 것은 “겸직”이니까. 그래서 많이 아프거나 사고가 아니고는 쉬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 “많이 예쁘거나 아플 때는 꽃이나 나무로 쉴 수 있다”. 너무 고향이 그립고 자연이 고플 때는 잠깐 “꽃이나 나무로 쉴 수 있다” 눈물겹게 잠깐…
그래도 “경계를 넘어서” 너무 쉬면 안 된다. “경계를 넘어서도 피어본 적 있다는 저 꽃은 요즘 많이 예쁘다 바쁘다”. “예쁘다 바쁘다”는 둘 다 “쁘”자 돌림이다. 어떻게 이렇게 긍정과 부정이 한 식구일까? 여기에 장명희의 아이러니 시학이 있다. 둘 다 너무 예쁜 걸 어쩌랴. 너무 좋은 걸 어쩌랴. 그래서 더 바쁘다. 그런 너무 예쁠 때, 좋을 때, 사정없이 필 때는 정말 조심해야 한다: “피고 질 때를 알아야…. 꽃들이 조심해야 할 때는 정작 푸른 날이니까”
도시에 살아야 하니까, 돈을 벌어야 하니까, 직장인이면서 시인인 것, 자연인 것은 때로는 힘들다. 꼭 일을 잘 하려고 해서는 아닐 수 있다. 완벽은 또한 병이니까. 예를 들어, 완벽한 사랑, 완벽한 결혼은 없다. 사니까 사는 거지. 거기 휴식처럼 “황금빛 잎새”가 되기도 한다. 괜스레 위대한 일, 행복한 삶을 고집하면 시인은 두 번 피로하다:
정말 중요한 건 잘하는지가 아니야
그냥 오래 같이 있을 수 있냐고
다시 또 돌아올 것이냐고
낙엽 쌓인 거기 쉴만한 자리
나무가 황금빛 잎새를 떨군다
배달원은 택배를 반쯤 남긴 짐칸을 정리하고 있다
가볍기 때문일까 약간 흐트러진 상자들이 가지런해 보인다
‘무슨 위대한 일’을 하겠다고 아침부터 나선 하루
신호도 없는 건널목에서 피곤에 지친 낮달 졸다 깨다
이 마지막 구절은 절구(絶句)이다. “신호도 없는 건널목에서” 쉬긴 왜 쉬는가? 그냥 “피곤에 지쳐서”이다. 그것이 “낮달”. 비약(飛躍)도 이쯤 되면 챔피언 급이다. 낮에 달이 나온 것도 어처구니없다. 낮에도 밤에도 일하나 보다. 아니면 뭘 해도 힘들고 지치나보다. 그것이 “낮달”. 그것이 나다. 그저 “졸다 깨다”. 그것이 도시 시인의 삶이다. 이 구절은 도시인의 사랑을 이야기한 T.S. Eliot의 저 유명한 “사랑의 노래”의 노을 이미지가 생각난다:
가자, 이제 너와 나
저녁이 하늘에 널브러져 누워있을 때
수술대 위에 마취되어 누워있는 환자처럼
Let us go then, you and I
When the evening is spread out against the sky
Like a patient etherized upon a table
-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
이 시는 물론 엘리어트 시의 모방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만큼 산업 사회의 인간성의 “황무지”를 노래한 엘리어트의 시세계와 맥락을 같이한다는 이야기.
장명희 시인의 시는 여기에서 보여주듯이 아이러니(irony, ironia, 비꼬기) 시법 사용의 귀재이다. 요즘 시처럼 산문적 어법이 주류를 이룰 때는 아이러니가 역설이나 파라독스(paradox)보다는 훨씬 표현력이 강하다. 쉽게 말하면, 아이러니는 앞 말과 뒷말이 아리송하게 논리나 관습에 안 맞는 경우에 발생한다. 예를 들어, “정말 중요한 건 잘하는지가 아니야”라고 한다. 그리고 “그냥 잘 못 해도 괜찮아” 정도의 말을 기대할 때, ”그냥 오래 같이 있을 수 있냐고/다시 또 돌아올 것이냐고”라고 말 하면 무슨 이야길 하는 건지 아리송해진다. 즉, “잘 못 해도 괜찮아” 한마디를 건너 뛰어, “오래 같이 있을 수 있어?” 하면, 잘 한다는 건지 못 한다는 건지 아리송하고 찝찝하다. 그리고 어떻든 싸우지 말고 오래 살면 행복한 사랑이라는, 쓸쓸하리만큼 아픈 체득의 묘(竗)를 짐작케 한다.
장 시인의 모든 시에서 이런 아이러니는 시인의 주특기이다. 다른 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야
몇 번을 들떠 들락거린 목련 뒤로 고개를 조금 내밀었다가
걱정쟁이 개나리가 깜빡 잊고 피어난다
여기에서 의인화한 목련과 개나리의 꽃피기가 아리송하고 너무 재미있다. 목련은 약삭빠르고 비겁하다: “몇 번을 들떠 들락거린 목련”. 그러나 개나리는 목련 뒤로 고개를 조금 내밀었다가 아직 제 철이 아닌 것을 그만 깜빡 잊는다: “걱정쟁이 개나리가 깜빡 잊고 피어난다”. 이 두 시구는 모두 제 철에 “우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야”에 대한 아이러니한 모습들이다.
아이러니는 늘 맞는 말 같으면서 맞지 않을 때, 틀리지 않아도 틀릴 때 아리송하고 빛이 난다. 그 속에 숨은 깊은 진실이 배어난다:
보드라운 것들은 따스하고 연약해
틀리지 않아도 다칠 수 있지 시들은 목련처럼
사포질을 배우며 자기의 조그만 걸 만들 때 행복했다고
말하는 목련은 우리 집 앞이 가장 늦게 피었지
잠은 때로 밤을 잊기 위해 고안되었다 할까
다 외울 수가 없어도 좋은 것만 기억하면 되니까
사실 보드라운 것들이 연약한 것은 맞을지 몰라도 “따스하다”는 것은 좀 뭐하다. 틀리지 않아도 다치는 억울함은 있어도 그것이 반드시 “시들은 목련”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이 말에 이 아름다운 목련이나 모란(영랑)이 영원히 시들지 않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이 숨어있다. 가장 맞는 말 같으면서 아리송한 게 “잠은 때로 밤을 잊기 위해 고안되었다 할까”라는 표현이다. 이 시구와 대구로 사용된 “다 외울 수가 없어도 좋은 것만 기억하면 되니까”는 또 무엇인가? 이 아리송한 시표현은 반대로 불면증에 시달리는 시인의 자기 위안 같은 거. 잠자는 것은 아름다운 것, 좋은 것을 다 놓칠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그 반대로…
도시는 “회색도로”와 산문 천지이다:
음 거기까지 왔었지, 회색 도로 행렬은 멈추지 않는다
중간쯤이면 어떨까
잘 머물려 하지 않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들은 모두 멀리 모퉁이를 돌아서 온다
기다리는 것들도 봄도 오지 않는다. 모두 “회색 도로 행렬”이다. 무거운 것들, 지겨운 것들, 회색 병목은 가지도 오지도 않는다. 그래서 시인의 시선은 먼 곳을 향한다. 차라리 잠을 잔다. 꿈을 꾼다. 그러나 건널목에서 잠들면 안되지, 다만 알아야 할 일: “기다리는 것들은 모두 멀리 모퉁이를 돌아서 온다”
사실 산다는 것은 산문뿐이다. 장 시인이 “도시 식물도감”에 집착하는 것도 실은 식물이 살 만한 데가 못 되는 도회에 몸담고 사는 우리의 모습을 진지하게 궁리해보자는 뜻일 게다. “사실 난 지금 돈도 없고 별도 없고 혼자인데도” 시인이 구태여 도시에 산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이다:
꽃집은 잠시 외출 중이야
너 대신 택배 오는 소리가 나고
며칠 전 오픈한 미용실 손님을 기다리는 문이 열리면
자주 켜지는 신호등은 잠시 숨을 돌리지
이렇게 쉽게 부서지는 건 현실일 수 없어
신호도 없이 서둘러 잘못을 훑고 가는 바퀴들처럼
잠깐인데도 너희는 다른 세계에
더 크고 멀리 달아난 것처럼 보여
사실 난 지금 돈도 없고 별도 없고 혼자인데도
바람비가 몹시 불면 옷을 꺼내고 넣고
겨울옷 빨래 돌아가는 소리
이런 게 그냥 사는 거야
꽃집이 어떻게 외출 중일 수 있는가? 이렇게 공간 이동 마술이 가능한 게 시인의 특기이다. 도시에 꽃이 살 수 있는가? 그런데 살고 있다. 자주 외출 중일 뿐. 그래서 비어있고 슬프고 외롭고… 꽃이 없는데 꽃단장 하는 데가 “미용실”이다. 이런 곳에서 “신호등은 잠시 숨을 돌리지”. 그런데도 “신호도 없이 서둘러 잘못을 훑고 가는 바퀴들처럼” 우리 인생은 굴러가고 있는 거지. 참 아이러니하지?
다시 말하지만, “사실 돈도 없고 별도 없고 혼자인데도” 나는 살고 있다. 바람이 많이 불면 두꺼운 옷 “꺼내고 넣고”,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다. 그저 “겨울옷 빨래 돌아가는 소리”가 다다. “사는 게 이런 거야”라고 자위하듯 말하는 시인… “장마”가 오면 시간이, 세상이 다 떠내려간다.
이렇게 뜻 없이 시간이 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에 섞여
아무도 모르는 사연에 섞여 흘러가는
더러 기분이 좋아지게 애착을 느낄 수 있게 견딜 수 있게
다시 돌아가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건 이 고마운 일터
비가 흠뻑 내리자 식물들은 더 싱싱해 보인다
어디까지 떠밀려 가야 할지 어디까지 떠밀려 갈지 일상의 수렁은 끝을 모른다
텅 빈 수렁 위
더러 잎새를 흔들며 날개 치는
백로가 사는 것은 신기하리만치 고맙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시적 소설”을 시대의 질곡 속에서 아프고 연하게 버티는 연약한 것들의 몸부림이 좋다고들 세계는 평한다. 장명희의 시의 특질은 바로 그런 “연약함”이 영악하게 “싱싱해 보이는” 모습이다. 아슬아슬해서 눈물겹다. 이슬아슬 해서 고맙다. 텅 빈 공간에서, 하늘도 없이 “더러 잎새를 흔들며 날개 치는/백로가 사는 것은 신기하리만치 고맙다”
장명희의 시는 장마가 와도 젖지 않는다. 그 젖어 떠내려가지 않는 비결은 함께 떠내려가 주는 것. 빗물이 되었다가 구름이 되었다가:
시간이 얼마 없어도
그러기로 되어 있지 않아도
쉽게 만족할 수 없는 거니까
거리는 잠시
빗물이다가 구름이다가
구름은 생각들을 치운다 이리저리
쉽게 찡그리는 주름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쉽게 마르는 구름은 쉽게 흘러가게
터벅터벅 저무는 저녁처럼
노을처럼 너와 나 하늘가에 머무는
이런 것이 인생이고 시다: “터벅터벅 저무는 저녁처럼/노을처럼 너와 나 하늘가에 머무는” 산다는 것이 살았다는 것이 이쯤되면 참으로 위안이지 읺는가? 그래서 하루의 훈장처럼 “노을”이 붉은 거다.
세상살이에 눈이 어두운 사람일수록 도시에 사는 게 좋다. 장 시인은 위로처럼 말한다: “지리에 어두운 사람일수록/더욱 두리번거리며 같은 길을 헤맬 테지만/상관없어요 스스로 길을 찾아요.” 그렇다. 인생을 안다고 얼마나 알랴. 좋은 대로 좋아하는 대로 살아보자: “당신이 좋아하는 곳까지 가 봐도 좋습니다/몇 번이고 길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도시의 길은 모두 대로로 통해있어요”
장명희 시의 아이러니는 어둡지 않다. 늘 비꼬는 사람들은 눈을 아래로 깔거나 입을 삐죽거리기 일쑤다. 그러나 장 시인의 아이러니나 비꼬기는 한국의 처마처럼 끝에 가서 약간 위로 향한다. 의자가 사람을 기다린다면 장 시인은 사람을 보내기 위한 거란다:
기다리는 의자는 사람을 보낸다
꽃잎은 날개를 펴고
날개가 있는 것은 모두 우묵한 밤들을 머금고 있는
노을은 익명의 여명이다
“노을이 익명의 여명”인 것을 아는 시인은 장 시인밖에 없다. 처마가 하늘의 시작인 것을 아는 사람은 한국인밖에 없듯이. 한국시는 고려가요부터 다 여성의 연약함과 곡선의 미학이 좋다. 한강의 시적 소설 쓰기가 오늘 세계에서 가장 깊은 인간적 목소리로 노벨상을 타듯이 장명희 시의 목소리는 연약한 진솔성의 극치이다. 우리의 교과서적 자랑인 고려청자, 도자기를 보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그리 연약한 걸 사랑했는지
어찌 그리 연약함이 도자기가 되었는지
물음표처럼 네 몸에 붙어 있었어
전통이라는 것을 심리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은 “집단적 잠재의식” 혹은 “집단적 무의식”이라고 부른다. “고려청자”는 민족의 잠재의식의 표현이면서 “물음표처럼 네 몸에 붙은 ‘인증샷’이다.” 연약한 걸 사랑함이 도자기가 된 여윈 염원의 영원한 아름다움이 형상화된 것. 그 모양에 “?” 이미지가 도자기에 붙어있다. 시인 자신과 전통의 무의식의 하나됨을 나타낸다.
장명희의 시는 “햇빛 도서관”처럼 편안하고 평안해서 좋다:
아무튼 햇빛 도서관은 그냥 쳐다보기만 해도 좋다.
무료인데
아프거나 (몸이나 맘이나 다 포함)
외롭거나
일이 바쁜 사람들은 이용할 수 없다.
회원가입은 햇살처럼 맘대로다.
좋아하기만 하면 따스할 수 있다.
어떤가. 이런 도서관을 한번쯤 이용해볼 만하지 않는가? “무료니까” 혹시 무료하거나 아프거나 외롭거나 누구나 올 수 있는 곳. “좋아하기만 하면 따스할 수 있다”는 말은 사랑의 자연스러움을 표현하는 눈물겹도록 진솔한 충고이다.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어서
그리움이 되었나
해 달 별
저 깊은 우주가 너희들의 집
슬픔이 아름다워질 때
난 이렇게 떠나와 있다.
그렇다. 때로는 가장 슬프고 소중하고 아깝고 아름다운 것을 차라리 멀리 두고 볼 때가 있다. 그것은 별과 달과 해. 이 시가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별처럼? 시인은 명상한다. “저 깊은 우주가 너희들의 집”인 것을 느낀다. 그러나 시인은 예수처럼 중생의 죄를 깨우치기 위해 바리세오의 모함을 받아 홀로 죽는다. 지장보살(地藏菩薩)은 고해에서 신음하는 중생이 모두 깨닫고 구원 받기 전에는 부처 되어 극락 가는 것을 사양한다. 시인은 이들 성인처럼 사랑과 자비로 스스로 청(請)하여 아픔을 산다. “슬픔이 아름다워질 때”까지 기꺼이 아픔 속에 있다. 무상무념(無想無念)의 깨달음이나 초월보다는 고뇌와 슬픔을 택하는 것이 시인이다. 그래서 말한다: “슬픔이 아름다워질 때/난 이렇게 떠나와 있다.”
구태여 불교나 기독교를 이야기해야 삶에 대한 성찰이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불완전이나 미완성이 훨씬 진솔하고 아름다울 때가 있다:
마음먹은 대로만은 절대로 되지 않는
완벽한 그림 하나 산뜻이
비 개인 하늘가에 걸어두고 다시 올 가을쯤을 기약하네
장명희 시인은 시도를 안다. 마치 이태백의 “나 취했으니 잘라네, 자네는 가고/내일 아침 술 생각나면 거문고 들고 또 오게나” 하는 식의 풍류도 냄새가 난다. 시도 그림도 “마음먹은 대로만은 절대로 되지 않는다”. 그런 미완성 그림 하나 “비 개인 하늘가에 걸어두고 다시 올 가을쯤을 기약하네”라고 말하는 장 시인이야 말로 시도와 풍류도를 안다.
장 시인의 시인으로서의 참 기질은 “그림 하나 산뜻이/비 개인 하늘가에 걸어두고”하는 기상천외의 “산뜻한” 이미지에 있다. 풍경화를 기댈 곳 없는 “하늘가에 걸어두는” 기발한 착상은 풍경과 자연이 하나임을 암시한다. 동시에 “하늘가”라는 크고 불분명한 장소에 작은 그림을 걸어둔다는 상상이 멋있다. 또한 “하늘가”라는 공간에 “비 개인”이라는 시간적 이미지를 오버랩시키는 기법 또한 훌륭하다.
장명희 시는 기독교, 불교, 풍류도 시학은 물론 착하고 연약하고 끈기 있는 한국 여성미의 장점을 모두 터득하고 있다. 장 시인의 아이러니 미학은 현실을 낮게 비극적으로 비꼬는 것이 아니다. 고려 청자나 한옥 지붕의 처마처럼 늘 하늘을 향한다. 가파르고 외롭고 가난한 현실 의식 위에 가녀린 긍정의 손짓이 끝없이 펼쳐진다. 현실은 얇아도 장 시인은 시 하나 “비 개인 하늘가”에 걸어두는 여유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