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들의 ‘멀티미디어’ 경험
‘멀티미디어’라는 말이 이미 낡은 표현으로 들릴 만큼 우리는 감각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항시 자극을 받는 우리의 오감은 지쳐 있고, 역치易置가 올라가 더 자극적인 것이 아니면 반응하지 못한다. 늘 영상을 좇으나 이를 해석할 여유가 없으니 감각이 넘쳐나지만, 주체적으로 공감각의 능력을 발휘하기는 어렵다.
풍월당에서 출간하는 『음악과 이미지』는 그런 면에서 미답지의 영역을 다룬다. 이 책은 악보, 악기 등 음악과 관련된 이미지를 통해 ‘옛 사람들의 멀티미디어 경험은 어떠했을까’ 하는 화두를 던진다. 하프시코드의 덮개, 류트의 공명홀, 갖가지 형태의 악보에 그려진 그림은 이미지라는 시각과 음향이라는 청각을 연결한다. 이 공감각은 또다시 당대 사람들의 관념과 세계관을 비춰준다.
공감각을 다루는 저자 박찬이의 시각은 독특하다.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걸리버 여행기』로 작곡을 한 음악가, 엔터테이너 역할을 하는 돌팔이 의사, ‘고양이 악기’가 만들어내는 우연의 음악 등 옛 사람들의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생생한 사례들이 가득하다. 감각과 상상력, 의미가 즐겁게 이어진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음악에 대한 실용적, 인문적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덤이다. 우리의 공감각 경험, 상상력은 어떠한가. 충분히 주체적인가. 『음악과 이미지』는 오늘의 독자들에게 그렇게 묻고 있다.
공감각
책의 중심에는 공감각 경험이 놓여 있다. 오랜 시간 광고업계에서 일한 저자 박찬이는 ‘색청’을 느끼는 복합 감각의 소유자다. 색청이란 음악을 들을 때 명암 혹은 색채를 함께 느끼는 것을 말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 오신 LP의 음악을 듣고 자켓의 그림을 보면서 음악과 이미지가 서로 연동되는 경험을 했다. 이 경험은 오랜 음악 감상 생활을 거치며 지금껏 국내의 어떤 저자도 다룬 적이 없는 특별한 주제로 그를 이끌었다. 옛 그림에 그려진 ‘악기’와 그 의미를 들여다보자는 것이었다. 물론 그림 자체에서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려진 악기의 소리나 악보의 곡조를 알고 있다면 그림을 보며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것은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감상 행위다. 이미지에서 음악을, 음악에서 이미지를 느끼려면 서로 다른 두 매체를 연결시키는 감수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수동적인 듣기, 무비판적인 미디어 중독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오늘날, 저자 박찬이는 적실한 주제를 건드리고 있는 셈이다.
고음악, 우리 시대를 비추다
또한 이 책은 그동안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고음악의 다채로운 세계를 일깨워 준다. 물론 고음악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옛 플랑드르 악기 제작자들의 이야기, 작곡가, 연주가의 이야기가 전체에 빼곡하다.
그동안 고음악 분야는 시대악기 연주 붐과 함께 지난 반세기동안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클래식 공연 및 음반 시장을 실제적으로 이끄는 동력이 되었다. 시대 악기 연주란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바흐의 음악을 바흐 시대의 악기로 연주하자’는 것을 말하지만, 점차 역사적 고증이나 ‘복원’ 이상의 영향력, 곧 현대성을 지니게 되었다. 고전 음악의 경전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누락된 걸작들을 다시 발굴하고, 이전까지 음악의 시장화, 근대화, 공연의 대형화 등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잊힌 여러 작품을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됐다. 그 결과 ‘시대 악기 운동’은 오늘날 클래식 음악 시장에 ‘새로운’ 작품들을 공급하고 있다.
이는 다시 감상자의 듣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근대화, 산업화, 대형화의 시대에는 크고, 영웅적이고, 웅장한 ‘공연장’ 음악이 ‘고전 음악’의 주류로 각광받았고, 그 빛이 강렬한 만큼 그늘을 만들었다. 그러나 대형 미디어, 대형 음반사, 대형 공연장의 일방향적 제작 방식이 후퇴하고 보다 다원적인 교류가 가능해지자 보다 친밀하고, 섬세하고, 세밀한 감성의 세계가 새로 조명 받았다. 고전, 낭만 시대의 음악이 여전히 시장의 주류에 놓여 있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다채로운 관심사와 취향을 반영하는 감상의 문화가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고음악의 약진은 결국 역설적으로 우리 시대의 취향을 말해준다. 박찬이의 『음악과 이미지』 또한 그러한 변화를 유쾌하게 드러낸다. 저자는 시종일관 관찰자적 시각으로 작은 것에 대한 호기심을 보여준다. 역사나 이념보다는 옛 악기, 악보에서 보는 세밀한 이미지를 통해 다양한 감각 경험의 즐거움을 앞세운다. 새로운 취향의 공동체 속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그 과정에서 고음악과 관련된 깨알 같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악기, 인간, 우주로 이어지는 인문학 여행
박찬이는 『음악과 이미지』의 각 부의 제목은 보이티우스의 『음악 원론』에서 가져왔다. 곧 악기의 음악, 인간의 음악, 우주의 음악이 그것이다. ‘악기의 음악’은 물리적 음악, ‘인간의 음악’은 인간 내부의 조화, ‘우주의 음악’은 천체의 조화를 말하지만, 저자는 이를 각각 악기 속의 이미지, 당대 사람들의 문화와 이미지, 그와 연관된 세계관과 종교관 등으로 펼쳐낸다. 이미지와 음악이라는 공감각을 중심 주제로 놓으면서도 인문학적 접근을 심화한다. 이를 통해 박찬이는 우리의 감각 경험 또한 우리 시대의 문화 및 관념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외양의 이미지, 인상의 이미지
이러한 구분법은 여러모로 유용하다. 1부 ‘악기의 음악’은 하프시코드, 류트, 바이올린, 목관 및 금관 악기들을 다루지만, 이미 악기의 외양(이미지)을 뛰어넘어 거기 깃든 인상(이미지)까지도 포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류트에는 조화라는 인상이, 바이올린에는 떠돌이의 인상이, 호른 등에는 사냥, 야외 활동의 인상이 따라붙는다. 이 인상은 다양하게 변형, 강화, 첨가될 수 있다. 줄이 끊어진 류트가 불화를 상징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문화에서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라거나 ‘동네 방네 나팔 분다’는 표현은 실제적인 모습뿐 아니라 모종의 인상을 동시에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이 책에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생생한 사례들이 넘쳐난다. 옛 이미지에 드러나 있는 사람들의 욕망이나 음흉한 속내를 들춰내는 쾌감 또한 이 책의 묘미다. 때로는 암호를 풀듯이, 때로는 이야기를 듣듯이, 이미지는 삶을 누설한다.
이로서 이미지, 소리, 관념은 옛 서양 문화를 보다 생생하고도 긴밀하게 이해하는 수단이 된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감각을 동원해서 이해하는 차원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이다. 독자 입장에서는 이 책에서 소개하는 갖가지 청각, 시각, 관념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새로운 예술 감상을 위한 기본 지식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의미와 상상력와 감각이 이토록 즐겁게 이어지는 책을 찾기란 어렵다. 음악 따로 미술 따로, 텍스트 따로가 아니라 이 세 가지를 한데 연결하는 흥미진진한 지적 체험이 될 것이다.
상세한 도판 해설, 주석, 추천음반
저자 박찬이는 이 책에서 다루는 회화 작품과 음악 작품을 제대로 누릴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가능한 한 상세한 해석과 주석을 실었다. 추천 음반도 책의 말미에 별도로 수록하여 공감각적 체험을 원하는 독자들을 배려했다. 읽기, 보기, 듣기, 이 셋을 연결하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지만, 저자의 친절하고도 세심한 가이드를 따라간다면 이전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의 순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