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1년 살러 갔다가 4년을 주저앉아 살게 된 이혜숙 작가의 산문집 《제주의 13월》이 ‘늘작늘작 댕기멍…’부제를 달고 출간되었다. 《나는 팝콘이다》, 《아직도 들고 계세요?》, 《꽃을 솎는 저녁》, 산문집 《1990 독산동 세 여자들》(2018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 수필선집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옷》을 이어 여섯 번째 책이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창작지원금에 선정되어 나온 책인 만큼 독자들의 마음을 홀딱 훔칠 읽을거리가 푸짐하다. 작가는 제주가 들려준 이야기를 그저 써나갔을 뿐인데 책 한 권 분량이 되었다고 자세를 낮추었다.
사람 사는 이야기는 가장 끌리는 소재이다. 그중에서도 나이 든 여인들이 살아온 이야기에 관심이 기운다. 한세월을 사는 동안 체득한 지혜와 성정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므로.
제주 섬사람들의 삶은 유지와 또 다르다. 미나 의상실, 춘자네 국수가게, 신산리 구멍가게 할머니, 물리치료실 옆자리의 해녀… 그들은 도처에서 만나는 스승이었다. 장애라는 신체적 제약을 딛고, 4.3 학살이라는 끔찍한 현실을 눈앞에서 지켜보면서, 한겨울에도 바닷속으로 뛰어들면서 몸 하나에 의지해 살아온 분들.
이혜숙 작가는 4년을 제주에 머물며 누구보다 열심히 움직이고 귀 기울이고 푸른 숨 들이켜며 움직였다. 제주 아낙들이 그렇듯이 놀지 않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일을 바지런히 수행했다. 좌절이나 체념 같은 말은 입에 올릴 적 없이, 꼿꼿하고 당당하게 현실과 맞짱뜨는 호기를 보았고, 정직하고 순수한 제주 사람들의 내면을 보았다. 저자는 그들 앞에서 권태니 무기력이니 하는 말을 감히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삶의 변화가 생겨 그들을 ‘스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남이 알아주길 바라거나 무슨 일에 성과가 있어야 한다는 조바심을 버린 것부터가 그랬다.
저자는 말한다.
“제주의 이국적인 아름다움은 육지에서 볼 수 없는 나무와 꽃뿐만이 아니다. 들판에서 마주친 노루, 목장의 미끈한 말과 유순한 소, 여름내 곁을 스치는 제비, 갈매기와 돌고래, 불쑥 나타나는 고양이까지 그 풍경을 이루는 퍼즐 조각들이다. 그들은 같은 종끼리의 소통뿐 아니라 다른 종 하고도 대화가 통하는 능력이 있다. 오가면서 그런 광경을 목격했을 때, 저절로 ‘환상 풍경’이라는 감탄이 나왔다.”
‘《제주의 13월》-늘작늘작 댕기멍…’에는 제주 토속어를 만날 수 있다. 저자도 제주에서 몇 년 지내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제주어였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 같아서 설명 없이는 뜻을 짐작하기 어려웠다고. 어미가 짧게 끝나는 이유는 바람의 방해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해주는 책이다. 토박이들은 제주어와 표준어 두 언어를 동시에 써 타지 사람들을 위한 배려한다니!. 처음엔 재미 삼아 적기 시작하다가 저자는 제주어의 매력에 빠졌다. 쓰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차츰 사라져간다는 제주어. 아름다운 것의 소멸만큼 안타까운 것이 있을까. 각진 듯하면서도 둥근 언어. 그 말맛을 전달하고 싶어서 글에 대화체를 제주어로 썼다니 기대되지 않는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제주의 속살 풍경까지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글에 등장하는 장터, 목장, 바다, 오름, 고사리 밭, 고양이 등을 저자가 영상에 담아온 것을 페이지마다 QR코드로 링크되어 있다. 담백한 글을 읽다가 쉼표를 주고 싶을 때 영상을 감상하고 제주의 정감 있는 사진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