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바탕은 민족공동체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자유민권운동과 함께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운동의 하나이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천황제를 전제로 한 개혁 구상이었다는 이유로 이전에는 부르주아 운동의 하나로 치부되었지만 패전 이후 일본 역사학계가 민주주의적 전통의 하나로 재평가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오늘날 역사학계가 내리는 일반적인 평가를 보면,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은 군주제를 유지하면서도 헌법의 새로운 해석과 보통선거, 의회중심주의의 도입을 통해 데모크라시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고, 그러한 시도는 1930년대 들어 시작된 파시즘 때문에 좌절했다고 본다. 이번에 출간된 이수열 교수의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미야자와 도시요시의 자유주의 헌법학」(도서출판 혜안)은 이 시기에 활동한 미야자와 도시요시를 중심으로 한 헌법학자들의 저작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분석하여 이 같은 역사학계의 평가와는 다른 특징들을 발견하고 전후 일본의 헌법까지 전망한 저서이다. 가까운 옆나라 일본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정밀하고 전문적인 분석이 많이 부족한 우리 실정을 감안하면, 대단히 귀중한 성과물이라 하겠다.
저자는 먼저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에서 주장한 ‘민주주의 사상’이 천황을 포함한 ‘민족공동체’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바탕으로 하였음을 지적하였다. 국가의 주권이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 전쟁과 함께 성장한 그들에게 국가란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존재였다. 그래서 데모크라시도 자유도 모두 국가의 안녕과 부강을 위한 수단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을 국사(國士)의 에토스를 지닌 경세가들로 표현하였다. 민족공동체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국민의 자발적인 충성심을 유도하는 정치제도로서 의회중심주의를 주장하는 한, 이 데모크라시 정치에서는 개인의 사적인 이익이나 권익 실현은 당연히 부정되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개인의 자유를 되돌아보지 않고 국정 참가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참정권 운동으로 일관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국가중심적 사고 때문에 개인의 자유는 독립적 가치를 갖을 수 없었고 민주주의 운동에 한계를 초래했다.
개인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한 미야자와의 자유주의 헌법학
미야자와 도시요시는 일본 헌법학사, 더 넓게는 정치사상사에서 개인과 국가의 관계를 혁신적으로 재정의한 인물이었다. 미야자와의 헌법학은 먼저 과학의 체계나 이론의 구축에 법학의 최종 목표를 설정하였다는 점에서 이전의 헌법학들과는 크게 달랐다. 일본 헌법학에서 주어로 군림해오던 국가를 그는 강제조직으로 다시 정의하였다. 또 그는 민족이나 국가가 아닌 개인에 최고의 가치를 두었던 점에서도 달랐다. 국가의 강제력과 개인의 자유를 두 개의 축으로 삼아 전개한 미야자와 헌법학은 필연적으로 자유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띨 수밖에 없었다. 미야자와는 민주주의를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정치형식으로 이해하고, 국가의 강제력과 개인의 자유 사이의 균형과 긴장을 강조했다. 이러한 접근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극복하여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중요한 시도였다. 특히 그가 1930년대에 발표한 일련의 국민주권 구상을 보면, 일본의 ‘전후’가 한 발 앞서 찾아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천황기관설의 미노베와 미야자와
정치학 영역에서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이끈 대표적인 사상가라면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와 오야마 이쿠오(大山郁夫)가 있고, 헌법학에서는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가 있다. 기존의 연구는 미노베를 천황주권에 도전한 민주주의 헌법학자로 평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오직 국가만이 소유할 수 있는 ‘통치권’과 국가 내부의 최고기관이 갖는 ‘주권’을 구분하고 전자에 최고의 가치를 두었다는 점에서 그는 결코 민주주의자가 아니었다. 주권 논의에서 결코 일반적이라고 할 수 없는 미노베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의 상황에 힘입어 데모크라시와 결합할 수 있었지만, 실상은 국민에 대한 국가의 우위를 주장하는 보수주의자의 면모를 갖고 있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주요 사상가들이 국민의 사익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국가 앞에서 국민의 희생을 강조한 이유는 그들이 최고가치로 인정하는 대상이 국가, 즉 민족공동체였기 때문이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과 천황대권론자의 대결 구도는 통설에서 이야기하는 ‘국민주권 대 군주주권’이 아니라 ‘국가주권 대 군주주권’이었다. 이러한 헌법 상황을 보며 자신의 학문을 구축해 나간 미야자와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이 주장한 의회중심주의를 더욱 민주화하여 일종의 의회주권을 구상했다. 한명 한명의 구체적인 국민 의사로 의회 대표를 구속한다는 그의 대중민주정(大衆民主政)은 실질적인 국민주권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그가 비판적으로 극복하려 했던 미노베의 입헌주의마저 탄압의 대상에 오르면서 더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하게 된다. 천황기관설 사건은 미노베뿐 아니라 미야자와에게도 큰 상처로 남았다.
시대를 앞서간 미야자와의 대중민주정의 숙제
이 책의 특징은 무엇보다 일본의 의회정치를 둘러싼 여러 논의들을 1910년대와 그 이후로 나누어 고찰하고 정밀하게 비교한 것이다. 의회중심주의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이 추구한 중심적인 정치목표였다. 의회제는 근대입헌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방식이다. 여기에 국가주의적 정신이 가미되었을 때 데모크라시는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가? 민본주의자들이 의회정치에서 궁극적으로 기대한 것은 무엇인가? 그 의회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가? 이는 국가주의적 데모크라시 운동이 근대입헌주의의 역사에서 어떤 부분을 수용하고 어떤 부분을 배제했는가의 문제이다.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의회제 민주주의관의 문제이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사상을 형식의 일치와 정신의 차이에 주목하면서 사상사적으로 재조명해 보려 한 저자의 작업은, 지금까지 다이쇼 데모크라시 연구가 주로 정당정치의 수립까지를 대상으로 하고 그 뒤의 와해 과정은 정당의 부패나 외압의 결과로 설명한 기존의 시각에 문제를 제기하고, 사상 내부에서 좌절의 원인을 찾아내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결과물을 도출하였다.
비상시로서의 1930년대는 일본의 정치·사회사뿐 아니라 사상사의 관점에서도 커다란 분기점이었다. 1910년대의 의회중심주의는 ‘세계의 대세’와 조화를 이루었던 데 비해 1930년대의 세계적 차원의 행정부 강화 현상은 의회중심주의와 정면으로 대치했다. 정치의 통일성과 행정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관점에서 보면, 정치의 다원성을 전제로 하는 의회정치는 이제 더 이상 비상시 정치와 통제경제를 담당할 적임자로 보이지 않았다. 의회중심주의와 데모크라시 운동이 밀월관계에 있었던 1910년대와 비교하여 1930년대 이후의 의회제를 둘러싼 객관적인 상황은 전혀 달랐다. 그리고 이때처럼 정신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국가주의적 데모크라시 사상의 문제점이 드러난 시기도 없었다. 일본의 의회주의자들은 과연 ‘위기의 의회제’를 지키려 했는가? 아니면 기능 부전에 빠진 의회를 버리고 강력한 행정부의 정치지도로 비상시 상황을 타개하려 했는가? 미야자와는 민주주의 가치가 선행하기 일쑤였던 다이쇼 데모크라시 사상을 상대화하며 자유주의적 입헌주의를 구상했다. 민주주의를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국가·정치 형식으로 이해하였던 미야자와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목적과 수단의 관계로 파악했다. 이러한 점은 개인의 자유에 대해 원리적인 거부감을 표명했던 다이쇼 데모크라시 사상과 큰 대조를 보였다. 또 이 시기 미야자와는 독일 공법학계의 정치화가 가져온 형이상학적 국민대표 개념의 부활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대중민주정(大衆民主政, Massendemokratie)은 의회를 국민 의사에 종속시킴으로써 실질적인 국민주권을 추구하는 내용이었다. 비상시 하에서 미야자와는 당대에 발표된 정치개혁안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과감하게 비판한 논쟁가였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사상은 1930년대에 들어 두 가지 데모크라시로 분화되어 갔다. 그 정통적 계승자들이 적극적으로 상황에 개입하며 의회중심주의에서 멀어져 간 데 비해, 미야자와는 의회정치를 더욱 민주화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두 진영은 상황에 대해 저마다 다른 태도를 보였고, 서로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이 두 가지 데모크라시 사상의 기원과 계보를 밝히는 작업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사상의 역사적 전개와 귀결을 통해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을 거꾸로 되돌아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미야자와의 헌법학을 통해 사상사의 관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결론은 크게 두 가지이다. 먼저 1930년대에 일어났던 의회제의 몰락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의 의회 중심주의자들을 포함한 총체적 자괴 현상이었다는 점, 그리고 일본의 데모크라시 사상은 1930년대에 들어 하나의 질적 변화를 경험했고, 그것이 패전 이후의 일본국헌법 체제를 준비한 사상적 토양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헌법학으로 보는 현대 일본 사회의 이해
지금 일본에서 헌법 개정의 입장에서 제출된 헌법 시안들을 보면, ‘민족공동체’에 최고의 가치를 두거나 ‘황실’의 존엄과 ‘국민’의 의무를 강조하는 점에서 다이쇼 데모크라시 사상과의 유사성이 눈에 띈다. 미야자와와 그의 ‘8월 혁명설’을 ‘악의 근원’으로 지목하는 선동적인 발언까지 나오는 사태도 이러한 상황의 반영이다. 저자는 결국 향후 일본 사회가 새로운 헌법을 제정할지 아니면 지금 체제를 유지할지는 오로지 일본 국민의 몫이라고 본다. 그리고 혹시라도 시안에 보이는 수준에서 개정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전전(戰前)으로의 회귀 또는 후퇴가 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이런 점에서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미야자와 도시요시의 사상이 과거사로만 그치지 않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주제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이수열 교수의 주장은 일본에게는 뼈아프지만 확실히 곱씹어볼 만한 고언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