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를 뒤엎는 ‘낯익은 첫 만남’
수없이 갈라진 평행우주의 그물 속 SF 만화의 유일한 계보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다양한 현실/비현실적 소재와 과학적 사실, 그리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우주의 비밀을 클리셰 없는 화법으로 그려내어 독자의 공감을 얻는 작가 ‘반-바지.’의 SF 단편 만화집, 《슈뢰딩거의 고양희》가 특별판으로 출간된다. 기존 작품의 리터칭 작업과 추가 작품을 수록하여, 연재 당시보다 질적으로 향상된 작품과 함께 더욱더 풍성해진 구성으로 《슈뢰딩거의 고양희》를 다시 만날 수 있다.
우주를 단지 도구로써만 활용하지 않는 SF 작품은 가능할까? 반-바지. 작가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우주가 우주이게 하는 물리법칙들,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생명체의 본질적인 의미, 시간과 공간에 관한 구체적이고 다각적인 사유, 우리의 세계에서는 결코 일어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사건이 일어나는 다른 평행우주, 혹은 우리에게 절대자의 힘이 있다면 불행하지 않을 수 있을지를 묻는 일(〈절대자의 딸들〉 연작). 이 모든 것은 단지 우주를 배경으로 한 감상적인 콘텐츠가 아니라 차라리 우주에 관한 모든 질문들을 봉합해낸, 유일무이한 대서사시에 가깝다.
‘보법이 다른’ 구성과 예측할 수 없는 전개
SF만화는 여기서부터 다시 정의될 것이다
“SF 비슷한 걸 그리는.”
‘반-바지.’ 작가의 X(구 트위터) 소개말이다. 《슈뢰딩거의 고양희》가 처음 출간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의 작품은 여타 SF만화와는 확연히 다른, 독특한 형식으로 독자에게 기억된다. 다시 말해, 이 ‘다름’이 그의 작품을 단순히 SF만화의 영역에만 국한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비단 작가 자신에게도). 전개와 결말이 분명하지 않고 흐름을 예측할 수 없이 펼쳐지는 이야기지만 작품의 메시지는 분명하게 각인되는, ‘반-바지.’ 작가만의 특수한 화법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작품은 과학적 사실이나 아이디어로부터 파생되는 내용을 담은 인물 간의 대화(다이얼로그)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단편들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이 드넓은 우주, 한 인간(혹은 기계나 다른 무엇)의 뇌 속에서 펼쳐지는 긴 독백(모놀로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찬가지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고정된 정체성이 아닌 마녀, 신과 악마, 우주인과 괴물, 시간여행자, 기계와 AI, 방송 BJ 등 다종다양한 정체성을 가지는 것은, 이러한 대화/독백이 전통적인 SF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이뤄질 수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반-바지.’ 작가의 만화는 SF라는 장르를 ‘현재진행형’으로 정의한다. SF는 더 이상 미래 시점의 초월적 환상이 아니며, 클리셰로 가득한, 과거에 붙들린 이론의 그림자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를 살아 있게 만드는 현재의 재해석이며, 현재를 존속시키는 장치(들)에 가깝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가 SF의 재료이자 가능태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