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첫 완역되는 ‘등화절’
“손님이 오면 과일 통조림을 열 때도 있었는데, 대개는 복숭아를 얇게 썰어 설탕을 뿌려 조금 숨을 죽여 뒀다가 차에 곁들였다. 물복숭아보다도 천도복숭아의 발그레한 색이 접시와 숟가락에 예쁘게 어울렸다. 반으로 크게 잘라 달콤하게 쪄서 먹을 수도 있지만, 천도복숭아 생 과육에 설탕과 우유가 들어가면 훨씬 더 부드러운 맛을 즐길 수 있다.”
-「돼지고기, 복숭아, 사과」
그동안 국내에는 『등화절』에 수록된 수필 몇몇이 소개되어 왔는데 수필가 가타야마 히로코의 진가를 알기에는 다소 아쉬운 감이 있었다. 이번에 처음 완역되는 『등화절』에는 일상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이 돋보이는 글뿐만 아니라 일본의 고전 시와 예이츠의 희곡을 소재로 한 품격 있는 표현이 넘치는 글들도 자주 눈에 띈다. 「애런섬」, 「과거가 된 아일랜드 문학」 등은 작가의 아일랜드 문학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글들로, 아일랜드 문학작품을 번역함으로써 일본에서 ‘아일랜드 문예부흥 운동’에 앞장섰던 가타야마의 세계시민적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꽃집 창문」, 「기쿠치 씨와의 추억」에서는 가타야마가 당대의 뛰어난 문인들과 문학적으로 깊게 교류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으며, 2차세계대전 전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상이 담긴 「가지밭」, 「어린이의 글」 등은 사회학적으로도 귀한 자료이다.
외교관 집안의 장녀로 태어난 가타야마 히로코(片山廣子)는 어릴 때부터 외국인 교사가 영어로 수업을 하는 기숙학교인 도요에이와여학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곳에서 서양 문화와 교양을 익힌 가타야마는 졸업한 뒤에는 글 쓰는 법을 배우기 위해 시인이자 국문학자인 사사키 노부쓰나(佐佐木信綱)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후 시와 수필 등을 발표하다, 1914년부터 마쓰무라 미네코(松村みね子)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는데 존 싱, 예이츠 등의 작품을 번역하여 일본에 아일랜드 문학을 소개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가타야마는 번역 문장으로 쓰보우치 쇼요, 모리 오가이, 우에다 빈, 기쿠치 간 등 평론가와 문호들의 격찬을 받는다. 그러나 당시는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보장되던 시대는 아니었다. 상류층에서 자라며 서양식 교육까지 받았던 가타야마였지만 문학은 어디까지나 취미였기에 원고료도 받지 않았다.
가타야마는 이 책 『등화절』에서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연상시키는 다채로운 음식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준다. 양배추를 잘게 다져 쌀과 함께 흐물흐물하게 푹 끓인 다음 소금으로 심심하게 간을 하면 완성되는 양배추 죽, 가지를 쪄서 반달 모양으로 썰어내는 가지회, 집게손가락만큼 작은 감자도 버리지 않고 껍질째 기름에 볶아 된장을 조금 넣고 지진, 알감자 된장 범벅… 「계절이 바뀔 때마다」, 「으름덩굴」, 「가난한 날 기념일」 등을 읽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도는 음식들이 독자들을 풍요로운 식탁으로 초대한다.
소소한 재미와 기쁨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은
“부모에게 다정했던 내 아들은 잡초 뽑는 일은 사람을 불러서 시키라고, 그리고 조금씩 독서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 영화를 보면 어떠냐고 권했다. 나는 바로 잡초 뽑는 할머니를 고용하고, 책은 읽지 않고 영화만 보러 다녔다. 혼자 보는 거라 정말 홀가분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커피도 마셨다. 그리고 또 아들이 말했다. 점점 나이가 드시니 영화 보는 것도 귀찮아지죠? 가끔 수필을 써보시면 어때요? 일기처럼 매일 뭔가 쓰는 것도 좋죠. 즐거운 일일 거예요.”
-저자의 「후기」에서
젊은 시절 시인, 수필가, 아일랜드 문학 번역가였던 가타야마 히로코는 결혼 뒤에는 평범한 주부가 되었다. 「단자쿠 손님」에는 과거 가타야마의 명망을 듣고 시 대결을 하러 온 손님을 못 알아본 자신을 ‘일하느라 덥수룩한 머리에 무늬가 든 작업복을 입은 아주머니’라고 표현했을 만큼 문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그랬던 가타야마가 다시 글을 쓰게 된 건 아들 때문이었다.
오래 묵혀두었던 책들을 펼쳐보고, 노트에 메모 비슷한 것을 끼적이고, 젊었을 적 스승을 회상하며 그와의 추억을 적고, 예이츠의 시극 「왕의 문지방」의 줄거리를 번역하며 즐거움을 느낀다. 어느덧 70대에 이른 가타야마는 일상에서 소소한 재미와 기쁨을 느끼며 살아간다. 노년의 어머니에게 수필을 권했던 아들이 원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이 모든 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들이 갑작스럽게 죽고 난 다음에 시작된다.
일본의 문예비평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1902-1983)는 자신의 수필 「미를 추구하는 마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슬픈 노래를 짓는 시인은 자신의 슬픔을 자세히 살피는 사람이다. 슬프다고 그냥 울지만 않는다. 자신의 슬픔에 빠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이걸 똑똑히 느끼며 말의 모습으로 가다듬어 보이는 사람이다.”
“몸도 마음도 한가했던 나는, 바람을 쏘일 책을 책상에 늘어놓고 수필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써봤다. (…) 그런 식으로 일기 같은 글을 늘어놓으며 나는 즐거워졌다.”
-저자의 「후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