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애증이 교차하는 길목, 종교와 신앙
오늘 한국 사회에서 종교는 대체로 존중받기는커녕 혐오의 대상까지 되어 간다. 1970~1980년대 내내 한국 사회 민주화의 성지로 자리매김하던 종교 시설, 민권과 민주의 수호자로 존경받던 종교 성직자의 모습 대신 사회분열의 최전선에서 종교인의 모습을 목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편으로 도무지 접점 없이 대치하기만 하는 정치나 양극화로 치닫는 사회와, 지구위기, 환경위기, 기후위기의 복합위기 속에서 내일의 생존을 기약할 수 없는 ‘인류세’ 시대에 영성(靈性)에 대한 갈급함이나 종교나 믿음 등 근원적인 해법을 요청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러한 상호 모순적인 두 가지 현상은 사실 하나의 요구가 두 갈래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행태를 탈피하여 새로운 믿음과 새로운 영성을 제시하는 종교로 거듭나라는 요구이다. 그리하여 다시금 현재와 미래, 인간과 지구 모두에게 희망을 제시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 전회를 꿈꾸다
이은선 교수의 『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참 인류세를 위한 한국 신학(信學)』은 한국 사회뿐 아니라 전 지구적인 범위의 현재 위기에 대한 근본적이고 본원적인 원인을 찾아내면서 정치와 경제, 교육 등에 종교와 신앙, 영성 등의 차원을 연결하고자 하는 노력의 과정을 담고 있다.
우리가 처한 국면을 포스트 근대’로 규정하고, 우리에게 긴요한 믿음과 신앙에 대해 사유와 지성적 성찰과 통합학문적 인식을 부가하는 ‘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의 전회를 통해 우리 사회와 인류 문명이 맞이하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는 길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학(信學)이라는 말은 2014년 세월호 참사를 맞이하며 저자가 떠올린 개념이다. 저자는 “이제 우리 삶의 진정한 문제와 관건은 바로 ‘믿음’과 ‘신뢰’(信)의 문제이고,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의 우리 ‘신학’(神學)은 ‘신학’(信學), 즉 ‘믿음의 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수백 명이 수장당하고도 온전한 진상 규명과 궁극적인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믿음과 신앙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믿음과 신뢰의 기본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로부터 재구축된 것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의 국내외 정세와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의 전방위적 학살 행위 등이 난무하는 오늘의 국내외 정세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 몸과 정신, 자아와 세계, 초월과 내재, 종교와 정치 등이 도대체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거듭 묻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이 곧 ‘신학’(信學), ‘믿음’에 관한 물음이라는 것이다.
『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
Ⅰ부 「사유와 신학」에서는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의 대표 저서 『노예냐 자유냐』를 핵심적으로 살핀다. 베르댜예프는 정신으로서의 인간 인격과 자유가 자연과 물질의 세계와 깊이 상관되어 있지만, 결코 그 후자로부터 연역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변증하려 한 20세기 전반기의 러시아 사상가다.
II부 「참 인류세를 위한 토대 찾기」 첫 번째 〈정의와 효〉는 동아시아적 효(孝)가 인간 정신에 내재하는 ‘존재론적’ 근거에서 비롯된다는 것과, ‘사유’(思)와 더불어 지속적인 정신의 힘으로서 우리 삶의 정의와 신뢰의 토대가 될 수 있음을 밝힌다.
두 번째 〈21세기 인류 문명의 보편적 토대로서의 성(誠)과 효(孝)〉는 우리 존재의 존재론적 근거로, 내가 ‘누군가에 의해서 태어났다’는 ‘탄생성’을 제시하며, 『중용』의 ‘성’(誠) 개념이 그것을 잘 드러낼 수 있다고 본다. 그 성(誠)이 우리 삶의 다원성의 조건과 믿음의 상상력과 창조력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그리고 인류 문명의 믿을 만한 보편적 토대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세 번째 〈참된 인류세를 위한 이신(李信)의 영(靈)의 신학〉은 저자의 선친 이신(李信) 목사의 학문을 천착한 것이다. 이신은 우리 시대에 만연한 “의식의 둔화”를 염려하면서 ‘영’(靈)과 예술가의 시대 전복적 ‘전위의식’ 속에서 새로운 믿음의 길을 가고자 했다.
네 번째 〈역·중·인(易·中·仁)과 한국 신학의 미래〉는 유교 문명권의 언어인 ‘역·중·인’이 보편적으로 기존 한국 신학의 신론과 기독론, 성령론 등을 전복하고 새롭게 하는 데 크게 유용한 언어라는 것을 밝힌다. 다섯 번째 〈퇴계 사상의 ‘신학(信學)’적 확장-참 인류세 세계를 위한 토대[本原之地] 찾기〉는 N. 베르댜예프, 한나 아렌트, 이신(李信)과 폴 리쾨르의 핵심 사유와 연결하여 신학 논의를 동양철학적, 한국 유학적 탐구의 지평과 연계하는 새 장을 마련코자 했다.
III부 「사유하는 신학(信學)으로의 돌파」의 글들은 ‘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의 전회가 어떻게 우리의 새로운 신(神) 이해와 예수 이해, 영(靈) 이해 등을 통해서 표현될 수 있는지를 드러내고자 하는 글들을 모았다. 한국 ‘신학’(信學)이 무엇을 지향하고, 어떤 내용의 학이 되기를 원하는지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종교와 과학의 대화로 진화론을 재해석하는 존 F. 홀트, 미국 드류 대학교의 여성신학자 캐더린 켈러와 제자 셀리 램보, 도올 김용옥의 『마가복음 강해』, 인지학자 루돌프 슈타이너의 『어떻게 하면 더 높은 세계의 인식이 가능할 수 있을까』나 함석헌의 『뜻으로 본 세계사』 등을 읽으며 신학(信學)의 의미, 가능성, 확장성 등을 살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