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행하는 KBS, 위기 속에서 쓰인 생생한 KBS 현대사
KBS의 시간이 역행하여 과거의 과오가 되풀이되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2022년 이후, 공공연한 낙하산 사장이 임명됨으로써 KBS의 신뢰도는 추락하고 내부는 무력감에 빠진 듯했다. 저자는 사장 재임시절을 기록하던 중 이러한 역행을 목도하고 펜을 바꾸어 든다. 그에게 깊게 각인된 ‘공영방송 구하기’ DNA가 발동한 것이다. 이 책은 이탈리아 역사가 크로체의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경구를 지침 삼아, KBS 민주화 30년을 기록하며 작금의 언론 현실을 바라본다. 스튜디오와 광장을 오가며 열렬히 고민하고 투쟁한 여정을 돌아봄으로써, 공영방송사의 내부 민주화와 제작 자율성 보장이 왜 중요한지를 논하고 KBS가 지켜야 할 가치에 대해 고찰한다.
저자는 1989년 KBS에 입사하여 30년간 방송 PD로서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그 후 3년 8개월 동안 사장으로 일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난 해에 태어나 1970~80년대를 몸으로 겪으며 한국 현대사에 깊은 관심을 갖던 저자는, KBS에 당면한 위기를 좌시할 수 없었다. 프로그램 제작에 전념하던 PD가 공영방송 구하기 여정에 뛰어들어 자율과 민주를 위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성찰의 기록 속에서 내일의 희망을 찾다
민주화를 테마로 돌아본 KBS 30년 현대사에서 가장 큰 축을 이루는 흐름은 진정한 공영방송을 만들고 지키려는 KBS인들의 투쟁이다. 정권의 방송장악에 맞선 구성원들의 분투, 낙하산 사장과 사원들 간의 갈등과 충돌을 모두 기록했고 그를 바탕으로 ‘공영방송 구하기’ 투쟁을 크게 다섯 차례로 구분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사원들 스스로 직능단체와 노조를 결성한 최초 투쟁부터, MB정부 시기부터 2017년 촛불 직후까지 10여 년 동안 지속된 5차 투쟁까지 선연하게 복원했다.
또한 저자는 단지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영방송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며, 미래를 향한 제언을 남기는 데도 공을 들였다. 다시 부끄럽지 않기 위한 성찰의 고백과 후배들에게 전하는 격려의 메시지를 조곤조곤 전하는 대목에서는 저자의 진정성과 따뜻한 성품이 느껴진다. KBS 사원들이 여섯 번째 투쟁의 서막을 열고 있는 지금, 구성원들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된 양심을 깨우고 용기와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참으로 시의적절한 책이다.
함께한 동료들의 이름을 역사의 궤적에 새겨 넣다
이 책은 KBS라는 조직, 사회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하루하루 자유와 민주를 지키고자 노력한 개인들의 이야기도 담고 있다. 먼저 저자 자신이 PD로서 이루지 못한 꿈에 관해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시사와 역사를 통찰력 있게 다루며 예술성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PD가 되어 언젠가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자신만의 작품을 출품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공영방송 구하기’라는 시대적 소명을 떠안고, 동료들과 함께 걸으며 ‘민주화’라는 길을 만들었다. 프로그램 제작에 더 몰두하지 못해 아쉽다는 진솔한 고백에 독자들은 자연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한편, 당당하고 꿋꿋하게 싸워 온 동료, 촛불을 들고 KBS를 지킨 시민들을 호명하는 장면에서는 기록의 귀중한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투쟁에 동참한 이들은 한겨울의 추위에 떨고, 가족 걱정으로 두려움에 떨었다. 낙하산 사장 거부 또는 퇴진 시위에 앞장서다가 구속되는가 하면 곡기를 끊고 단식을 선택하기도 했다. 보직 때문에 사측에 동조했던 이들은 부끄러운 행동을 반성하는 사과 성명을 낸 후 평기자로 좌천되기도 했다. 이처럼 《스튜디오와 광장 사이에서》에는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투쟁하면서 시민과 시청자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고자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함께 길을 걸었던 동료들이 잊히지 않고 오랫동안 기억되게끔 그들의 이름을 역사의 궤적에 새겨 넣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