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 한국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그 모든 것은 어떻게 달려왔는가?
우리가 살아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현대사는 역사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다. 끊임없는 선택 속에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는 역사학계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민감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면서도 그 나름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참여의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독보적이다. 지금의 ‘나’를 이룬,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보물창고’와 같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부터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7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대중문화·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삶과 역사의 무대를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방대한 주석에 당시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 ‘역사 산책’ 코너 등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恨)과 욕망의 폭발’(1940년대), ‘극단의 시대’(1950년대), ‘기회주의 공화국의 탄생’(1960년대), ‘수출의 국가종교화’(197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1980년대), ‘분열은 우리의 운명, 연대는 나의 운명’(1990년대), ‘노무현 시대의 명암’(2000년대), ‘증오와 혐오의 시대’(2010년대) 등 각 시대를 지배했던 정서와 구조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주제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진보’의 이름으로 새로운 가치를 선점할 수 있듯이 극단과 궁핍의 시대를 살아남아야 했던 과거 세대의 ‘아픔’도 함께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가 ‘인간’을 배제했던 역사라고 간파하며 ‘인간’의 복원,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이념과 세대의 새로운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증오와 혐오의 시대’였던 2010년대
2010년대는 ‘증오와 혐오의 시대’였다. 즉, 2010년대는 열정은 들끓고 눈에는 핏발이 선 시절이었다. 서로 마주 보며 적대감을 발산하면서 오직 자기편만이 옳다고 부르짖었다. 정치 팬덤이나 정치·사회적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그 어떤 숭고한 뜻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종국에는 그 뜻의 실현에 방해가 되는 사람이나 세력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먹고산다. 다시 말해 이들은 반대편이 증오를 필요로 하는 대상이라는 걸 입증하기 위한 ‘악마화’를 시도하면서 자신의 증오와 혐오를 정당화했다. 이들의 경쟁력은 누가 더 증오와 혐오를 잘 부추겨 사람들을 광기의 수준으로 몰아갈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들의 증오는 오직 우리 편이냐 아니냐 하는 기준에 의해서만 활성화될 뿐이다. 그러니 증오와 혐오를 발산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와 더 화끈한 콘텐츠를 제공해달라는 수요가 폭증하면서 스타급 정치군수업자들은 돈도 벌면서 소비자의 사랑과 존경까지 누리는 정신적 지도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2010년대의 메인 테마인 ‘증오와 혐오의 시대’는 2020년대까지 이어졌으며, 이제는 아예 한국 정치의 구조적 속성으로까지 자리 잡을 기세다. 증오와 혐오가 아예 없는 세상은 가능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증오와 혐오가 정치의 근본적 동력이자 일용할 양식이 되는 세상을 정상적인 사회라고 보기는 어렵다. 2010년대를 지배했던 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권은 하나같이 관용과 자제는 없었다. 관용과 자제가 없었던 역사를 극복하기 위한 뜨거운 촛불 민심에 의해 세워진 문재인 정권에서조차 관용과 자제는 없었다. 당시 야권 정당들이 문재인 정권을 ‘연성 독재’라고 부르는 것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2022년 윤석열이 ‘공정과 상식’의 원칙을 집권 후에도 계속 실천했다면, 증오와 혐오의 열기는 가라앉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윤석열은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을 능가하는 내로남불의 화신처럼 행세함으로써 오히려 증오와 혐오의 열기를 뜨겁게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2010년대』는 모두 5권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은 2010년과 2011년, 제2권은 2012년과 2013년, 제3권은 2014년과 2015년, 제4권은 2016년과 2017년, 제5권은 2018년과 2019년의 역사를 담아냈다. 강준만은 이 책이 역사서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화이부동(和而不同)과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지향하는 ‘편향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좌우나 진보·보수 가운데 어느 한쪽을 편드는 편향성 대신 화이부동과 역지사지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2010년대는 과거 그 어느 때 못지않게 ‘정치의 최소화’가 아닌 ‘최대화’와 ‘극대화’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그만큼 진영 논리에 따라, 어느 편이냐에 따라 사건을 보는 시각이 극단적일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정치학자 제리 스토커는 “정치는 진실을 추구하거나 누가 옳은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건설적 방법이다”고 말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증오와 혐오가 없는 ‘냉정’이다. 더불어 우리 편과 우리 편이 아닌 사람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2010년대를 지나온 우리가 알아야 하는 교훈이자 이념이다.
이명박, 세종시 원안 백지화 선언
이명박은 2009년 11월 27일 밤 MBC 특별생방송 프로그램 〈국민과의 대화〉에서 세종시 원안을 백지화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명박의 발언은 뜨거운 갈등의 진원지가 되었다. 이명박이 세종시 원안 백지화를 밝히고 있는 동안, 세종 시민이 될 걸 기대하고 있던 지역 주민들이 “행정도시 백지화를 규탄한다”며 촛불집회를 열고 있었다. 2010년 1월 6일 국무총리 정운찬은 이명박에게 세종시를 9부 2처 2청이 옮겨가는 행정중심복합도시 대신 ‘첨단교육과학중심경제도시’로 성격을 완전히 바꾸겠다고 보고했다. 민주당과 충청권 보수정당인 자유선진당 등 야당은 즉각 전국적인 반대 투쟁에 나섰다. 여당 내에서도 친이계와 친박계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박근혜는 “수도권 과밀 해소와 국토균형발전을 근본 취지로 법을 만들어 통과시켰고, 그 취지대로 실현하겠다고 한나라당이 선거 때마다 약속했었다”고 강조했다.
세종시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6·2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패배하면서 정리 국면으로 들어갔다. 이명박은 “국회에서 결정해줄 것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이는 이명박이 고수해왔던 ‘한나라당 당론 결정→국회 상임위 통과→본회의 표결’이라는 처리 방식 대신 곧바로 국회에서 표결로 처리해줄 것을 제안한 것이다. 이로써 9개월여를 끌어온 세종시의 행정중심도시 성격 변경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이명박은 “국회 결정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기고, 세종시를 둘러싼 갈등을 넘어서서 국가 선진화를 위해 함께 나아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정운찬은 세종시 백지화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채 국무총리직 사퇴 의사를 공식 발표해 재임 10개월 만에 물러났다.
‘민간인 사찰’과 ‘정치 사찰’ 파동
국회 정무위에서 야당 의원들은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이명박을 비방하는 동영상을 개인 블로그에 옮겨 게재한 KB한마음 대표 김종익을 내사하고 사무실을 불법 ‘압수수색’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폭로했다. 이 사건의 핵심은 민간인에 대한 감찰을 할 아무런 권한이 없는 기관에서 국민을 상대로 사찰의 칼날을 들이댔다는 것이었다. 이 ‘민간인 불법사찰’ 파문은 공무원 사조직인 ‘영포회’ 문제로 확산되었다. 민간인 사찰을 벌인 이인규는 영포회 출신인 청와대 인사에게 관련 내용을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포회는 포항 출신인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권력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으며, 이명박 정권 출범 원년인 2008년 11월부터 정치권에 본격적인 논란을 일으켰다. 민주당은 민간인 불법사찰을 “영포 게이트”로 규정하고 이명박을 향해 “영포회 해체”를 요구했다.
‘민간인 불법사찰’은 여당 중진 의원인 남경필의 부인을 사찰한 것으로 밝혀져 ‘정치 사찰’ 논란으로 확산했다. 또한 정두언과 정태근 등 다른 여당 의원들에 대해서도 전방위로 뒷조사를 벌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은 이인규와 김충곤 등 2명을 구속기소하고, 원충연을 불구속기소했다고 밝혔지만, 남경필·정두언·정태근 등 자신과 부인 등 주변 인사들이 불법사찰을 당한 ‘피해 의원’들은 ‘깃털’만 건드린 검찰 수사에 강한 분노를 표출했다. 이들은 사찰의 배후로 이상득을 공개 거명하기도 했다. 정태근은 “청와대에 차지철이 살아온 것 아니냐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청와대에 해당 인사의 문책을 촉구했다.
오세훈의 ‘무상급식 투표’ 도박
2010년 12월 1일, 서울시의회가 서울 지역 모든 초·중학생에게 무상급식을 지원하도록 규정한 조례를 의결했다. 그러자 오세훈은 “복지의 탈을 쓴 망국적 포퓰리즘 정책을 거부한다”며 “시의회 횡포에 대해서 서울시장의 모든 집행권을 행사해 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1년 초 서울시의회의 전면 무상급식 조례 공포에 반발해 주민투표를 제안했던 오세훈은 보수 성향 단체가 서울시에 ‘학생 무상급식 주민투표 청구’를 낸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주민투표가 복지 포퓰리즘에 종지부를 찍을 역사적 기로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상급식이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핵심 의제인 것처럼 등장하는 이상한 사태가 벌어진 것은 2010년 6월 지방선거 때부터였다. 그 후 보수는 저소득층에 한정해 무상급식을 하는 ‘선택적 복지’, 진보는 전면적 무상급식을 하는 ‘보편적 복지’로 갈라지면서 정치적 싸움이 지속되었다.
오세훈이 무상급식에 반대한 것은 ‘대권에 대한 야심’ 때문이었다. 그 야심을 위해서는 큰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의 확고한 브랜드를 갖기 위해 확실하게 튀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오세훈의 전투적 ‘프레임 전략’은 한나라당 내에서도 반발에 직면했다. 남경필과 김문수 등은 무상급식 찬반 주민 투표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남경필은 “독선이 도를 넘고 있다”고 비판하는 등 무상복지 반대론을 펼치는 오세훈과 대립각을 세웠다. 오세훈은 투표율 33.3%에 미달하면 시장직을 사퇴하겠다고 공식 발표했고, 무상급식 주민투표 결과는 개표조차 할 필요가 없는 25.7%로 오세훈의 패배였다. 오세훈은 그날 밤 11시 예정대로 사퇴를 선언하고 4년 임기 중 겨우 14개월 일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10월 재보선에서 10년 가까이 유지하고 있던 서울시장 자리를 민주당에 내어주고 말았으니, 이 때문에 오세훈은 당내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이는 그의 컴백에도 큰 지장을 준 원죄가 되었다.
‘황족, 왕족, 귀족, 호족, 중인, 평민, 노비, 가축’이 사는 나라
“인구의 19%가 해마다 이사를 다닌다. 전 인구 다섯 명에 한 명꼴, 1년에 약 870만여 명이 이삿짐을 싸고 푼다.” 가축을 키우기 위해 옮겨 다니는 유목민을 제외하고 한국인은 세계 최고의 노마드족이 된 셈이다. 공동체? 사회? 그런 건 없었다. 오직 ‘내 집’만 있을 뿐이었다. 아파트 소유자는 이익을 위해 5년에 한 번꼴로 이런 노마드 삶을 자청했지만, 셋방 사는 사람들은 “빵 뺄래 방값 올릴래”라는 이분법적 요구에 의해 3년에 한 번꼴로 이런 노마드 삶을 강요당했다. 아파트는 상품이요 재테크의 수단이었다. 2007년 서울시는 장기전세주택 사업을 시작하면서 “집은 사는 것에서 사는 곳으로 바뀝니다”는 슬로건을 내걸었지만, 아파트가 ‘사는 곳’이라기보다는 ‘사는 것’이라는 건 상식이 된 지 오래였다. 즉, ‘살 집(house for living)’이 아니라 ‘팔 집(house for sale)’인 것이다. 그러니 아파트가 무너질 지경이라는데 ‘경축! 구조 진단 통과’라는 플래카드가 걸리는 것이다.
한국의 수도권에는 황족, 왕족, 귀족, 호족, 중인, 평민, 노비, 가축 등 부동산 계급이 8개 있다. 2011년 2월 온라인에 떠돈 ‘수도권 계급표’에는 거주 지역의 땅값 크기대로 일종의 ‘부동산 카스트’가 매겨졌다. ‘황족’을 맨 위로 이하 ‘왕족’, ‘귀족’, ‘호족’, ‘중인’, ‘평민’, ‘노비’ 등의 계급을 매겼고 맨 아래는 인간 축에도 끼지 못하는 ‘가축’ 계급으로 평가했다. 서울 강남구는 토지 가격이 3.3제곱미터당 3,000만 원 이상으로 가장 비싸 ‘황족’으로 분류되었고 3.3제곱미터당 2,200만 원 이상인 과천시와 송파·서초·용산구 등은 ‘왕족’에 포함되었다. 1,100~1,200만 원인 노원·구로·은평·강북·중랑·일산동구는 ‘평민’에 포함되었다. 최하 계급인 ‘가축’들이 사는 1,000만 원 미만의 거주지는 ‘그 외 잡 시&군&구’로 표시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