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 역사와 더불어 첫 걸음
내가 《한 출판인의 자화상》이란 이름으로 자서전을 낸 지 올해로 벌써 꼭 12년이 되었다. 2011년 9월에 초판을 냈는데, 작년에 6쇄를 찍었다. 이 책은 영광스럽게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된 바 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도 좀 멋지고 솔직한 자서전 한 권쯤은 써 보리라 마음먹은 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출판에 손대기 시작한 지 거의 반 세기 만의 자서전이었던지라 정작 출판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풀어내지 못하였다. 더구나 이 자서전에서는 정작 제목과 달리 순탄치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로 끝을 맺은 아쉬움이 컸다.
일본 고베(神戶)에서 태어나 초등 3학년 때 아버지의 고향인 전남 여수 돌산으로 건너와 성장한 어린 시절부터 무작정 상경, 대학입학과 함께 활자와 인연을 맺게 된 사연, 군사정권 시절 남산 지하실에서 모진 고초를 겪었던 일과 범우사를 창업하고 겪게 된 《다리》지 필화사건, 어머니의 죽음, 국제 앰네스티 민주화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겪은 출판을 통한 수난 등 그 때까지의 인생 역정을 정리하여 나름대로 ‘한 출판인으로서의 자화상’을 그려 보려고 했다.
반 세기 동안 출판 외길을 묵묵히 걸어온 책의 길이 〈출판을 통한 민주화운동 수난〉으로 끝마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에리히 프롬의 《건전한 사회》(김병익 역, 1975.8)를 발행하기까지 순탄치 않았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발행한 뒤에도 한바탕 곤욕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책은 ‘동아투위’의 활동을 지원하려는 취지에서 당국의 탄압을 무릅쓰고 수사기관원들의 눈을 피해가며 낸 책이다. 그래도 그 시절이 지금도 새롭다. 《건전한 사회》의 질곡이 가시나 싶었을 무렵, 1980년대 접어들자마자 우메모토 히로시의 《미테랑 그 인간과 전략》(최현 역, 1981. 11)이 뚜렷한 이유없이 판금조치를 당하는 등 범우사의 수난은 그치지 않았다.
내가 자서전을 이렇게 끝맺은 이유가 지금은 분명치 않다. 이런 이야기만으로는 내가 살아온 출판인생 자체가 패배의 기록이란 생각을 감출 수 없다. 나는 그런대로 성공한 출판인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있는 사람이다. 출판인생이 힘들고 고민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돌아보면 그래도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쓴 《한 출판인의 자화상》이 ‘나의 책의 길’의 전부도 아니다. 정작 출판인으로서 보람이나 역경을 헤쳐 나오기까지의 고심했던 과정, 성찰과 반성은 하나도 정리하지 못해 미련이 있었다.
그래서 《한 출판인의 자화상》을 내면서도 “본격적으로 출판계에 투신한 후에 겪었던 이후의 일들을 자료 정리를 겸해 솔직하게 후편을 쓰고 싶다”고 의지를 밝힌 바 있다. 그것이 한국 출판계의 치욕이 되었건 영광이 되었건 우리의 지난날의 역사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한번 정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살아오는 동안의 이야기가 본의 아니게 동료 출판인이나 어느 특정인에게 혹 결례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서 이제까지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보니 차일피일 지금까지 미루어져 왔다. 그러나 나도 이제 ‘90 고개’의 문턱에 이르고 보니 내 삶을 정리해 놓는 일을 더이상 미룰 수는 없는 일이 되었다.
우리 출판의 역사조차 제대로 정리해 놓은 자료가 많지 않은 현실에서, 내가 겪었던 경험이나마 증언 삼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용기를 내기로 작심했다. 말하자면, ‘나의 출판사(史)’를 써 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출판인으로서 내가 일상생활에서 느꼈던 갈등과 고민, 기쁨과 희열, 고통과 분노는 《한 출판인의 사초(私草)》란 이름으로 내가 발행하고 있는 월간 《책과인생》에서 나의 일기를 정리해 가고 있다. 이제까지 1982년부터 2001년까지를 6권으로 묶었다. 이 ‘사초’에는 그 때그 때의 감정과 생각이 생생하게 묻어나고 있다. 다행히 이 일기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공감도 하시고 격려도 해 주시는 데 용기를 얻어 현재까지 정리해 가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이것대로 계속 정리해 나갈 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일기를 써 왔고, 그 대부분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다행히 이 일기는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출판인으로 활동하던 기간의 일기만큼은 모두 공개할 작정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써 내려가고자 하는 자서전의 속편은 이들 일기와 중복되지 않고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을 수 있도록 ‘나와 현대 출판사’를 증언하겠다는 심정으로 그때그때 업계 실황 정리에 중심을 두려고 한다. 이런 자서전이 흔히 빠지기 쉬운 자기 합리화나 자화자찬의 폐단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되도록 객관적 회고와 성찰에 치중할 생각이다.
― 글쓴이 윤 형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