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명의 삶을 어떻게 버티고 있는가?
한 무명(無名) 감독의 사랑과 이별에 대한 짧은 단상들
〈육룡이 나르샤〉라는 드라마에는 ‘무명(無名)’이라는 비밀조직이 등장한다. 물론 드라마이기 때문에 가상으로 만들어 낸 조직이다. 말 그대로 이름이 없다. 그들이 주고받는 비밀 암호는 바로, “이름이 없는 자, 영원하리!” 신라 시대에 만들어졌고 나라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목적을 둔 정보조직이며 고려를 세우고 끝까지 지키기 위한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한다. 무명(無名)의 활약을 통해 드라마의 긴장감과 재미가 더해져 완성도 있는 드라마가 되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무명(無名)이 택한 방식이 바로 보부상이라는 것이다. 실제 역사와 상상력이 절묘하게 만나는 지점이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조직이었지만, 뭔가 진짜 존재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도록 만들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비록 드라마지만 ‘무명(無名)’이라는 비밀조직이 나라와 시대를 넘나들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이름이 없는 자’라는 구호다.
여기 무명(無名)의 한 영화감독이 있다. 그는 국내외 유명 대기업과 IT 관련 일을 컨설팅하며 잘나가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 30대 후반 영화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대책 없이 무작정 연출의 길에 들어선다. 하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그가 정성을 들여 만든 영화들은 어느 영화제에서도 불러주지 않았고 상영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우리들은 그의 영화를 볼 방법도 없다. 그렇게 10여 년이 흘러 영화진흥위원회의 소소한 지원도 받고 4년간 시간을 갈아 넣어 만든 그의 첫 장편을 드디어 극장에 개봉하게 되었다. 기쁨도 잠시 이 영화 역시 소리소문없이 조용히 OTT의 한구석을 차지하게 된다. 결국 그는 성공하지 못한 독립영화 감독이 되었다. 그런 그가 《AI의 꿈》이라는 시집을 출간했다. ‘사랑’이라는 주제로 ‘과학 발전에 따른 인간성과 사랑’이라는 담론으로 인공지능 시대를 이야기하는 그의 시는 영화가 아닌 쇼츠를 보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가 지난날 써놓고 묵혀 놓았던 영화와 사랑에 대한 단상들 역시 그가 왜 잘나가는 IT 관련 직업을 버리고 영화와 시에 빠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시 〈양자역학〉에서는 사랑의 역학관계를 설명하며, 〈인공지능〉과 〈딥러닝〉은 우리 인간과 경쟁하며 사랑을 구애한다. 〈Starcraft: 마린의 꿈〉, 〈Starcraft: 메딕의 추억〉에서는 메딕과 마린의 슬픈 사랑을 노래하며 왕가위의 영화 〈화양연화〉로 서정시의 종말에 경의를 표하는 그의 상상과 서정성은 독립영화와 시가 사라져 가는 현시대를 아쉬워한다. 그의 시는 짧은 호흡으로 이어진다. 장편이 사라져 단편이 되고 그 단편이 쇼츠가 되는 참을성이 없는 우리 시대의 트렌드에 반하지 않고 그 문법을 이용하여 여백의 여지를 이용한다. 이제 중년을 지나 노년의 나이에 들어서기 시작한 영화감독은 이제 시인으로 돌아와 사랑의 씁쓸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 그의 여유가 신선하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씁쓸함은 그가 지금 만들고 있는 장편영화 〈왕가위를 찾아서〉의 로그라인과 시집이 하나로 이어진다.
인공지능이 발달하면서 개인은 더 파편화하고 부속품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참을성 없는 우리 시대의 단면은 기계가 인간성을 빠르게 대체해 가는 것에 대한 위기감은 아닐까? 길고 긴 호흡의 스토리는 사라지고 직관적으로 한방에 주목받지 않으면 안 되는 짧은 호흡의 쇼츠들, 눈과 눈을 마주치고 손과 손을 맞잡는 그런 만남이 사라지니 사랑과 이별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나를 알아주고 주목해달라고 잊지 말라고 아우성치는 세상이 되어가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점점 더 잊히고 이름이 없는 존재가 되어가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시가 그래서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그가 글로 남긴 애틋하고 씁쓸하고도 달콤한 사랑에 대한 기록이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고 훗날 이 모든 게 사라질지라도 어쩌면 삶은, 사랑은, 역사는 모두 무명(無名)의 영원한 기록이 될 것이다. 사라지는 듯 보이나 우리 가슴 속에 영원으로 남을 무명(無名)의 삶을 응원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묻고 싶다.
“우리는 무명의 삶을 어떻게 버티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