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딕테』는 당시 시대상을 아득히 뛰어넘은 걸작입니다.
미국에서 그랬듯이 한국에서도 고전이 되면 좋겠습니다.”
시인 캐시 박 홍, 김승희 강력 추천!
영상과 책, 영화와 문학의 경계
『딕테』는 1982년 작품으로, 문학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책을 한 번 펼쳐보면 이것을 과연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지 혼란이 온다. 여타 문학 작품처럼 감상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책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영상처럼 감상하는 것이 더 수월하다. 그도 그럴 것이 차학경은 미국 UC버클리에서 미술과 비교문학을, 파리에서는 영화 이론과 구조주의 언어학을 공부하여 영상 매체의 작품을 많이 남기기도 했고 구조주의 실험 영화에도 큰 관심이 있어 그가 작업한 영화 관련 프로젝트와 논문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작가가 직접 특별한 방식으로 판화처럼 아주 조금의 부수만 제작하는 아트북을 본 적 있을 것이다. 이런 책들은 시각예술로 분류되지만, 차학경의 『딕테』는 출판사에서 제작되며 ISBN(국제표준도서번호)을 가진 엄연한 출판물이다. 이것이 아트북과 다른 점은, 대량 생산 및 배포의 가능성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차학경은 이 책의 내용이 많은 사람에게 도착하기를 바라며 더 넓은 세상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책의 가능성에 대한 개념미술적 실험
책은 다른 예술 작품들에 비해 작고 가볍고 제작이 비교적 간단한, 가장 경제적이면서도 완성된 매체다. 차학경은 이 책이라는 매체가 가진 가능성의 한계를 실험한다. 흔히 생각하는 영상 매체는 2차원 평면의 시간 예술이다. 문학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감상하지만 영상과는 다르게 독자 개개인이 원하는 속도로 읽을 수 있고 중간에 멈추거나 뒤로 돌아갈 수도 있어 더 능동적인 시간 예술이다. 차학경의 『딕테』는 여기서 큰 한 걸음을 더 내딛는다. 이 ‘책’은 3차원의 공간적 형태에 시간의 차원이 더해지는데, 이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며 존재하고 있다. 왼쪽과 오른쪽 페이지가 마주 보며 상호작용하는 구성은 2채널 비디오와도 같다. 게다가 독자가 책을 손에 든 상태에서 얼마큼 펼치고 어떻게 드느냐에 따라 공간에서 책이 향하는 방향도, 책 속 이미지들이 관계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시각 예술 분야의 작품이라기엔 매우 작고 가벼운 이 책은 다른 영상 매체들보다 휴대가 쉽고 그렇기에 관람객에게 더 많은 자율성을 준다. 이것은 차학경의 예술 철학이기도 하다. 감상자의 자율성을 강조하며 언어를 재료로 사용하는 개념미술의 흐름과도 맥을 같이한다.
『딕테』의 난해함이 주는 자유
『딕테』는 읽기 어려운 작품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이 ‘난해함’이라는 수식어가 사실 작가가 바랐던 것이라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험을 해보는 것도 이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이 된다면 어떨까? 차학경이 활동하던 1970-80년대의 미국 사회에서는 영어를 세계 공용어로 하자는 논의가 일반적이었고, 당시 미국인들 중 대다수는 모국어를 벗어나 문맹의 상태가 되는 ‘엑소포니(exophony)’를 거의 경험해보지 못했다. 차학경은 작품에 라틴어, 한국어, 한문, 프랑스어, 영어를 등장시킴으로써 당시의 미국인 대중에게 엑소포니의 경험을 하게 했다. 결국 이 언어적 난해함으로 독자에게 시야를 트이게 하는 자유로움을 준 것이다. 『딕테』는 책을 읽는 사람들 개인의 언어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달리 읽히고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는 곧 이해의 경계 너머에서 질문하고 다르게 바라볼 자유를 경험하게 한다.
(특별 기고: 학연, 『아트렉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