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근 시기 곡물 가격은 기후 변화의 지표이자 기후(환경)사의 최고 증거, 기후사가 물가사 없이 서술될 수 없으며, 물가사도 기후사 없이는 서술될 수 없다”
명 말 ‘숭정 위기’(1638~1644) 동안 중국에서는 전례 없이 심각한 수준의 한파와 가뭄, 전염병, 돌풍, 지진, 메뚜기 떼 피해가 복합적으로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수백만 명이 사지로 내몰렸다. ‘천년 만의 가장 심각한 7년’이었고 그중 1642년은 최악의 해였다. 양쯔강 삼각주 부근 퉁샹현의 사대부 천치더는 이렇게 썼다. “이 시기에는 시장에도 구매할 수 있는 쌀이 없었다. 곡물을 가진 상인이 있어도, 사람들은 가격을 묻지 않고 지나쳤다. 부유한 자들은 콩이나 밀을 찾아 헤맸고, 가난한 사람들은 왕겨나 썩은 음식물을 찾아 헤맸다. 몇 두의 왕겨나 나무껍질을 얻을 수 있는 것만도 기쁜 일이었다.”명제국은 2년 후 붕괴되었다.
중국 벼농사의 특성상 한파와 많은 강수량보다 한파와 가뭄의 조합이 훨씬 위험했다. 여기에 팬데믹이 겹치면서 물가는 치솟았고 인플레이션은 명의 경제와 사회 체제를 무너뜨리며 정치 체제도 함께 무너졌다. 티모시 브룩 교수는 명제국을 몰락시킨 극단적인 곡물 가격과 인플레이션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요인은 ‘기후’였다고 단언한다. 수백 개의 가격 데이터를 수집한 후, 그 시점이 소빙하기 기후 변화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중국을 사로잡은 것은 정치적 실패가 아니라 기후적 실패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왜 물가에 초점을 맞출까? 기근 시 곡물 가격을 기후(환경)사와 연결짓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학자들이 기후 변동을 물리적 지표를 통해 추적하지만 어떠한 기후 시뮬레이션도 1640년대 가격 재앙으로 “사람들이 완전히 지쳐 버린”그 순간을 정확히 포착할 수 없다. 이것이 명대 기후사가 물가사 없이는 서술될 수 없으며, 물가사도 기후사 없이는 서술될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곡물이 한파나 가뭄으로 망가질 때, 그 영향은 인간이 기근을 겪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곡물의 기근 가격을 형성했다. 기근 시 곡물 가격이 기후 변화의 척도이고, 우리가 가진 환경사적 증거 중 최고라는 것이 티모시 브룩의 통찰력 있는 설명이다. 이 책은 천치더가 기록한 1640~1642년의 재난 상황과 물가 자료(「재황기사(災荒記事)」를 명대 역사를 이해하는 도구로 삼아 이야기를 확장해간다.
“서민들 가정이 한 해를 버티기 위해서는 은 14냥, 중산층의 가정은 23냥 이상”
저자는 명과 청 그리고 민국 시대의 약 3천 권에 달하는 지방지와 수필, 일기, 회고록 그리고 영국 동인도회사의 장부까지 모았다. 777건의 방대한 기근 시기 곡물 가격 자료를 추출하여 쌀, 보리, 밀, 콩 등 곡물과 72개 상품을 더해 광범위하게 가격을 비교했다. 물가를 기후 변화의 결과로서만 바라보지 않고, 그 관계를 바꾸어 명대의 물가를 기후 변화를 감지하는 대리지표로서 활용하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물가 변동과 기후 변동의 상관관계를 추적한 것이다. 여기서 물가가 기후 변화의 대리지표로서 기능하려면, 기후 변화의 충격이 없는 상황에서는 물가에 눈에 띄는 변동이 없어야 한다. 하여 저자는, 이 책의 2장에서 명대의 물가가 외부 충격이 없는 한 일정한 가격 범위 속에서 평준화 압력이 작동하는 ‘가격 체제’ 속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저자는 명대 연평균 인플레이션율을 0.3퍼센트로 추정했다) ‘공정 가격’이라는 관념이 작동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특히 이 책에서 티모시 브룩의 빼어난 학술적 공헌은 명대 서민 가정이 먹고살고 자녀를 양육하기 위한 연간 생활비와 벌이를 추정한 점이다. 노동자, 군인, 자영업자, 장인, 어부 등 가장 가난한 가정이 한 해를 버티기 위해 은 14냥이 조금 넘는 돈이 필요했고, 중산층의 생활비는 23냥 이상이었다. 서민들의 연간 임금은 은 5냥에서 12냥 사이였으며 부족분은 텃밭에서 먹거리를 생산하여 해결했다. 중산층의 임금은 14냥에서 22냥 사이였고 이들 역시 텃밭 같은 부수입이 조금 더 있었다. 또한 저자는 명대의 가격 체제를 재구성했는데 은 1푼, 1돈, 1냥으로 살 수 있는 각각 25가지 물건을 추출하여 제시하는데 무척 세세하고 흥미롭다. 역사가 단순히 위대한 통치자나 강력한 군대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생존해야 했던 조건에 관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명 말의 극단적 물가 상승은 지구적 ‘은 무역’ 때문이 아닌 ‘기후’ 문제였다
티모시 브룩은 명 말의 기록적인 물가 상승의 원인이 화폐 공급량 때문이었다는 일부 역사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반기를 든다. 중국사가 세계사의 일부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 은의 전 지구적 유통이었음은 틀림이 없다. 문제는 물가가 급등하기 전에 이미 은이 중국으로 유입되었고, ‘숭정 위기’ 동안 곡물 가격이 은의 이동에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명제국의 경제는 유럽 전체 경제와 비슷한 규모로 충분히 컸기 때문에 유입된 은을 상업적 교환 시스템에 통합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불안정해지지 않았다. 이렇게 은의 유입 때문 위기를 초래했다는 견해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고 사치품 물가와 곡물 물가의 변동을 구분하며 당시 중국의 시장 가격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동하는가를 재조명한다.
중국이라는 농경 사회의 곡물 가격은 농업 번영과 인간 생존, 그리고 정치적 안정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척도였다. 그 경계를 무너뜨린 것은 화폐 공급이 아니라 소빙하기 동안 농업 생산의 자연 조건이 악화된 것이었다. 곡물 가격은 태양 에너지와 인간의 수요 사이의 관계를 매개하는 장치다. 경제가 에너지원으로 태양 복사에 의존할 때, ‘자연’은 사회나 국가의 생존 가능성을 결정하는 요소임을 인식해야 함을 강조한다. 요컨대 저자의 주장은 전 지구적 무역 때문이 아니라 전 지구적 기후가 명나라의 곡물 가격을 치명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여섯 차례의 기후위기, 장기적인 회복력과 한순간의 붕괴 사이
저자는 명대의 가격 체제와 기근 시기의 곡물 가격을 종합한 끝에 3세기에 걸친 명제국의 역사 중 물가 폭등과 환경 재앙이 일치했던 대기근 기간을 식별해냈다. 저자가 전작 『하버드 중국사 원명_곤경에 빠진 제국』에서 소개한 여섯 번의 ‘위기’로, 영락 위기(1403~1406), 경태 위기(1450~1456) 가정 위기(1544~1545), 만력 위기1(1586~1589), 만력 위기2(1615~1620), 숭정 위기(1638~1644)다.
명대 대부분의 시기에 쌀 1두의 정상 가격은 은 3~4푼, 만력 연간과 그 이후는 4~5푼 정도였던 것이 환경 위기가 닥친 기근 시기에는 은 10푼에서 30푼 사이로 뛰었다. 특히 숭정 위기에는 1두당 은 1냥에서 2냥으로, 어떤 지역에서는 4냥에 달하기도 했다. 지방지에 기근시 곡물 가격이 기록된 777건 중 32퍼센트가 1638년에서 1644년 사이의 숭정 위기 7년에 집중되어 있었다. 명대에 기후 변화는 수차례 있었지만 숭정 이전의 위기 때 물가 변동 폭은 일정 수준을 뛰어넘지 않았다. 일부 ‘위기’는 1456년 겨울 경태제에 대한 궁정 쿠데타와 같은 정치적 재앙으로 끝났지만 대부분은 ‘회복력’이 발휘되어 다시 안정화의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앞선 다섯 차례의 위기 때 회복력을 발휘한 것과 1640년대의 붕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숭정 위기’는 여러 차례 환경 위기의 단계적 축적의 결과였던가? 여기서 티모시 브룩은 장기적인 기후 혼란과 단기적인 기후 혼란, 즉 기후 변화와 날씨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명대 중국인들은 환경 압박에 대해 두드러진 회복력을 보였다. 관개 및 배수로와 같은 인프라 구축, 벼의 조기 숙성 같은 작물 변이, 곡물 창고 및 곡물 시장과 같은 제도 개발, 양수 펌프와 같은 기술 고안, 식량 공급 압박을 완화하기 위한 인구 조절 등의 혁신들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장기적인 혼란은 인간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숭정 위기’는 환경 재앙의 규모가 달랐다. 갑작스럽고 심각할 경우 적응을 촉진하기보다는 압도하는 경향이 더 컸던 것이다. 저자는 숭정 위기 같이 극단적인 재앙이 닥칠 때의 역사적 자료들에서는 적응에 관한 묘사가 없고 그저 단순히 대규모 기근이 발생했으며 아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간단히 언급한다 했다. 4세기 전 그들은 압도당했던 것이다.
중국의 소빙하기 중 최악의 시기 동안 한파와 가뭄이 곡물 생산에 미쳤던 부담은 1850년대까지 재현되지 않았다. 청대 사람들은 숭정 이후의 가격에 적응하고 18세기에 새로운 가격 체제로 이행했지만, 19세기 중반 소빙하기가 끝날 무렵에 발생한 기후 변화는 기근, 내란 및 그에 따른 왕조의 붕괴로 이어졌다. 몇십 년 전부터 기후위기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환경 압박과 그 규모에 대해 외면하거나 크게 주목하지 않지 않았나? 최근의 식료품 가격 폭등은 적극적이고 근본적인 해법과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이라도 이 책을 펼쳐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