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보다 마음이 큰 것 같아”
흐릿한 존재들에게 쥐어지는 일련번호
안개, 연기와 같은 희미한 존재성을 바다, 하늘과 같은 선명하고 깨끗한 언어로 아름답게 어루만지는 차유오 시인의 첫 시집『순수한 기쁨』이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4부 구성으로, 신춘문예 당선작 「침투」를 포함한 총 55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남겨졌다” “버려졌다” “가라앉는다” “사라진다”…… 차유오 시인의 시에는 수많은 동사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동사는 대부분 약하고 어렴풋하다. 소리 내어 읽어 보지만 왠지 없는 단어처럼 추상적이다. 시인은 빈 방울을 한데 모아 큰 거품을 만든다. 흩어지길 좋아하는 모래알을 겹겹이 쌓아 단단한 형체를 만든다. 사라질 법한 장면들, 언젠가는 사라질 장면들, 오래된 기억들을 창고에 물건 쌓듯 차곡차곡 쌓는다. 관조를 일삼다가도 어느 순간 그는 언어를 채 썰어 커다란 냄비에 담는다. 딱딱하고 건조하기만 했던 언어에서 수분이 조금씩 새어 나온다. 주걱으로 조려지는 언어를 뒤집고 섞는다. 그렇게 그의 시는, 눈이 아닌 몸으로 만들어진다.
시집 1부는 아득한 바다를, 2부는 투명한 얼음 동굴을, 3부는 희미한 안개 속을, 4부는 새하얀 눈밭을 거니는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화자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면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것이 될 텐데” 중얼거리며 주저하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 진짜 같은 가짜를 마음에 두고 진심인 것처럼 믿으며. 사랑할 줄 모르면서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우리는 가짜와 껍데기를 사실처럼 믿으며 어떤 시절을 진실처럼 살아가기도 한다. 이에 시인은 오로지 ‘마음’만이 진실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다고 말한다.
구석의 자리에서
겨우 마음이 되려고 하는 이야기
1부에서 4부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마음이 자리를 가지고 놓이게 된 근원들과 귀결된다. 시인은 아무도 없는 버스, 텅 빈 가게,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오후, 잃어버린 물건 등 희미하고 쓸쓸한 일상의 풍경을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사라질 법한 존재들을 아름답게 예찬한다. 특히 2부에서는 시집의 정체성이 조금 더 두드러지는데, “빠져나간다” “쏟아진다” “흩어진다” “날아간다” 등의 동사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화자와 청자 모두에게 희미하고 서늘한 필터를 씌워 준다. 그러면서도 자유롭고 광활히 떨어지는 물방울 아래에 “빈 바구니”를 둠으로써 사라져 버릴 법한 모두를 하나로 모이게 한다. 정처 없이 헤매는 마음에 지정석을 둔다.
3부에서 화자는 종종 관찰자가 된다. “휴” “프린팅” “레고” 등 인간 아닌 로봇의 삶이 좀 더 구체적으로 등장하면서 그들의 감정과 생각을 상영하고 “그” “그녀” “당신”의 풍경을 통해 제삼자의 객관적 시선을 끌어낸다. 시집 후반에는 유령이 되어버린 도시, 관 속에 잠긴 죽음, 폐허가 되어버린 집 등 어둡고 암울한 장면이 대거 등장하다가도 “떠나보내도 다시 돌아오도록” 어렴풋한 일들을 자연스레 다시 한데로 모은다. 그렇게 어느 순간“찌그러진 캔”은 서서히 “단단한 형체”가 되어간다.
4부는 흔적을 따라 이어진다. 눈밭에 남은 발자국, 우산꽂이에 꽂힌 우산, 아무도 타지 않은 자전거, 오래된 시계 등 남겨진 것에 대한 애틋한 예찬이 이어진다. 사물은 흔적을 갖고, 흔적은 다시 사물이 된다. 이곳에서 시인은 조금 더 쓸쓸해진다. “함께 하고 있지만 하나가 될 수는 없는” 공간 속 사람과 사물, 기억과 사건들. 마음의 보풀은 그 일련성에서 태어난다. 외로워지려 할 때쯤 “흩어진 장면들을 모아 하나의 장면으로 응집”시키는 그를 따라, 마침내“그곳에 있”는 모든 광경을, 우리는 보다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시집 『순수한 기쁨』은 “그늘”진 “구석”에 덩그러니 있다. 책들이 겹겹이 쌓인 테이블의 가장 맨 아래, 찾는 이는 모를 위치의 책장 가장 높은 곳에, 허리를 구부리거나 몸을 숙여야만 볼 수 있는 곳. 시간과 마음을 들여야만 가닿을 수 있는 곳. 그런 소심과 침묵이 잘 다려진 곳에『순수한 기쁨』이 은은하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