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출판 b에서 쥘 드 고티에의 〈보바리즘〉을 진인혜 교수의 완역으로 발간하였다. 〈보바리즘〉은 물론 쥘 드 고티에의 저작도 국내 초역으로 그동안 ‘보바리즘’이라는 말을 듣고 관심은 있었지만 원전을 읽을 수는 없던 독자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 〈보바리즘〉은 인문학과 철학, 문학에 관심 있는 독자들, 〈마담 보바리〉를 읽고 그 인물형에 관심이 생긴 독자들, 플로베르 문학, 나아가 19세기 프랑스 문학의 연구자들, 쇼펜하우어와 니체 연구자들과 독자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작품이다.
우선 쥘 드 고티에는 보바리즘이라는 용어의 기원이 된 플로베르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제Ⅰ부 보바리즘의 병리학”에서 플로베르 작품의 인물들에게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보바리즘을 검토한다. 단지 보바리 부인의 경우만이 아니라 플로베르의 모든 등장인물을 검토하면서 감정적인 보바리즘, 지적인 보바리즘, 의지의 보바리즘, 예술적 보바리즘, 과학적 보바리즘, 형이상학적 보바리즘 등을 거론한다. 마치 문학 비평을 방불케 하는 플로베르 인물들에 대한 광범위한 분석을 통해 보바리즘이 플로베르의 작품에 일관성과 통일성을 부여하는 요소라는 것을 보여준 쥘 드 고티에는 곧이어 개인과 집단의 보바리즘에 대한 보편적인 고찰을 거쳐 인류와 현상적 실재의 보바리즘을 향해 나아간다. 그는 자유 의지나 자아의 단일성과 같은 관념의 이면에 숨겨진 기만과 착각을 파헤치면서 모든 존재는 필연적으로 자신을 실제와 다르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밝힌다.
“진리의 보바리즘”에 할애된 제Ⅱ부에서는 보바리즘이 현상적 삶의 본질적인 조건으로 드러나면서 보바리즘의 병리학에 뒤이어 건강한 측면이 부각된다. 쥘 드 고티에는 제Ⅱ부의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을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객관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끊임없이 달라진다. 자신을 다르게 생각하는 것, 그것은 살아가는 것이고 발전하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런 새로운 관점에서 출발함으로써 플로베르의 작중인물에게서는 하나의 결점이었던 보바리즘이 인류를 위한 진보의 원천이 된다.
“제Ⅲ부 보바리즘, 진화의 법칙”은 바로 이에 대한 상세한 고찰이다. 그리고 “제Ⅳ부 현실”은 실증적이고 현상학적인 관점에서 보바리즘이 현실을 생산하는 수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보바리즘은 이제 현실의 창조자가 됨으로써, 정신의 변형 능력에 불과하던 보바리즘은 창조적 능력으로 그 위상이 바뀌는 것이다.
이처럼 제Ⅱ부~제Ⅳ부에서는 유사한 반전을 통해 보바리즘이 “상승 능력”과 “창조 능력”으로 재평가된다. 이와 같은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보바리즘을 세상의 진보를 위한 만능열쇠로 여기는 일종의 메시아주의가 연상된다. 하지만 그런 해석은 쥘 드 고티에가 가장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그는 삶에 윤리적인 목표, 다시 말해 끊임없는 진보를 통해 지향해야 하는 도덕적 목표가 있다는 가정을 일절 거부했다. 파리대학교 전신인 콜레주 데 카트르 나시옹Collège des Quatre- Nations 건물 벽에 새겨진 그의 명언이 말해 주는 것처럼, 그에게 ‘세상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바라볼 구경거리’이다. 쥘 드 고티에에게 보편적인 형태의 보바리즘이 유용한 이유는 현상적 드라마, 현상적 삶의 구경거리를 위한 다양하고 무한한 소재를 제공하여 구경꾼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 외에는 어떤 목적성이나 현실성도 없이 바라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플로베르는 보바리즘에 의한 착각과 실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즐기거나 인류의 원동력으로 보기는커녕 불가피한 비극적 요소로 여겼다면, 쥘 드 고티에에게 보바리즘의 착각과 실수는 삶의 변화를 초래하고 현실을 존재하게 하는 필수적인 요소로서 구경꾼에게 구경거리를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한다.
요약하자. ‘보바리즘’(Bovarysme)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쥘 드 고티에의 용어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실제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역량”이다. 플로베르의 위대한 소설 〈마담 보바리〉(1857)의 주인공 보바리 부인은 시골 의사의 아내로 살아가는 자신의 인생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으로 잇따른 불륜을 벌이다 애인에게 바친 선물의 빚을 갚지 못해 자살한다. 쥘 드 고티에는 보바리 부인이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의 실제 현실이나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그로부터 도피해 자기가 원하는 이미지를 지향하고 그걸 현실로 믿어버리는 인간 정신의 경향이 있음을 파악해 이를 ‘보바리즘’이라 이름 붙인다. 쥘 드 고티에는 신분제가 흔들려 능력에 따라 신분이 바뀔 여지가 커진 19세기 유럽 사회의 개인과 그들의 욕망에 집중했으나, 사실 21세기 한국 사회는 자기 변화와 출세의 욕망이 훨씬 더 커진 사회다. 즉 19세기의 보바리즘은 21세기에도 생각해 볼 가치가 크다. 아니,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엄청난 발전과 자본주의의 전면화에 따른 빈부격차가 만든 현실은 ‘지금에 안주하지 말라’는 명령을 개인에게 계속 내린다. ‘보바리즘’은 이제 변화와 진보를 향한 가치관으로 인정받는다. 쥘 드 고티에 역시 같은 판단을 내린다. 그는 보바리즘의 병리성에서 보바리즘의 진보성을 파악하고, 이것이 인류에게 계속 될 것이라 전망한다. 쥘 드 고티에는 여기서 글을 끝맺지만, 보바리즘의 병리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급증하는 개인의 욕망을 이용해 성공했던 자본주의는 언제까지 유지될 것인가?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키는데 빈부격차의 문제는 왜 해결되지 않을까? 욕망과 변화의 갈구를 시스템은 언제까지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이미 이 세상은 수많은 보바리즘 중독자들 중 극소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폐기 처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21세기의 보바리즘은 우리에게 다시금 진보의 원동력이 아닌 개인과 집단의 병리성을 성찰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병리성에 대한 성찰은 보바리즘을 전면화시키고 찬양하면서 이를 자신의 동력으로 삼은 시스템에 대한 성찰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모든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보바리즘〉을 읽을 필요가 있다!
역자의 말
“쥘 드 고티에가 1892년에 보바리즘을 심리학의 용어로 소개한 이후, 정신의학자들은 보바리 부인이 구현하는 유형의 인물 즉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불가능한 ‘다른 것’을 갈망하는 인물들이 앓는 정신 질병에 보바리즘의 개념을 적용하였다. 정신의학에서 보바리즘은 일종의 히스테리나 망상증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쥘 드 고티에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보바리즘에 관한 두 번째 책을 통해 보바리즘을 다시 철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보바리즘에 관한 두 저서를 비교해 보면, 1892년과 1902년 사이에 쥘 드 고티에의 생각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니체의 영향 아래 주로 심리적인 것으로 시작된 보바리즘 개념이 점점 철학적인 위상을 획득함으로써 처음에는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차원에 연결되어 있었던 개념이 나중에는 선과 악의 차원을 넘어서게 된다. 그러므로 쥘 드 고티에의 저서를 읽다 보면, 보바리즘이라는 개념이 놀라울 정도로 확장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제공하는 “쌍안경”을 끼고 플로베르의 작품을 다시 읽는다면, 작품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적어도 보바리 부인은 더 이상 욕구 불만에 차 있는 19세기의 전형적인 부르주아 여인의 상징이 아니라 진정한 존재론적 모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쌍안경으로 현실을 주시한다면, 우리는 우리 주변의 현상에 대한 이해력을 넓힐 수 있을까? 쥘 드 고티에가 쌍안경을 “몇몇 사람들의 손”에 맡긴다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어쩌면 구경꾼의 미학은 매우 제한된 엘리트에게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바리즘이 인간의 필연적인 운명이라면, 우리는 구경꾼의 미학적 시각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서 삶을 미학적으로 관조하려는 보바리즘적 시도를 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착각과 실수의 과정에서 우리의 능력과 감수성에 적합한 어떤 요소를 발견하여 예기치 않은 목표에 이르는 행운을 맛보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옮긴이 해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