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사가 김이나, 시인 이병률 추천
“봄은 짧고 기다림은 길지만 어쩌겠는가”
《당시삼백수》 번역자가 고른 끝없이 아름다운 노래
“꿈속에 치자꽃 향기 은은하게 코끝을 스쳤는데
눈을 뜨니 베갯머리 머리칼에 서늘함이 느껴지네.
밤새 문을 닫아거는 것도 잊고 잠들었는데
두 봉우리 사이로 지는 달빛이 슬며시 침상 위로 올라온 것이었네.”
- 황경인, 〈취했다 깨어〉 전문
시를 읽고 삶에서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고. 저자는 큰 병에 걸려 병상에 있을 때, 그동안 일로만 읽었던 한시가 돌연 생생하게 바뀌어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보여 주었다고 고백한다. 1천 년 전 옛 시인들이 낡은 글자에서 걸어 나와 때론 따스한 시선을, 때론 고요한 평안함을, 때론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때론 다정한 충고를 전해 주었다. 병상에서 꼼짝하지 못할 때도 시 속으로 들어가면 나무 그늘이 시원한 숲길을 거닐 수 있었고 광활한 들판을 달릴 수 있었으며 창가에서 영롱한 달빛을 보거나 차가운 냇물에 손을 담글 수 있었다.
특히 인생 후반을 맞은 사람들에게 한시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격정이 걷히고 자연과 세상이 명징하게 보일 때, 한시가 묘사하는 자연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젊은 날부터 품었던 꿈과 희망을 이젠 실현하게 어렵다는 것을 실감할 때, 한시 속 섬세한 감성과 삶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바쁜 걸음을 잠깐 멈추고 싶다면,
더 나은 나를 꿈꾸고 싶다면,
삶에서 영감을 얻고 싶다면,
품격 있고 우아하게 쓰고 싶다면
“봄밤의 한순간은 천금만큼 소중한데
꽃은 맑은 향기 뿜어내고 달빛엔 구름이 어른대네.
누각에서 들려오는 노래와 피리 소리 아련한데
뜰에는 그네가 내려진 채 밤은 깊어만 가네.”
- 소식, 〈봄밤〉 전문
한시는 자연을 섬세하고 감각적으로 묘사한다. 소식이 지은 시를 가만히 읽고 있으면 봄철 꽃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고, 봄밤 공기가 포근하게 살에 닿는다. 시의 장면이 눈앞에 떠오르면서 장면 속에 머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가 하면 이런 시도 있다.
“종일토록 봄 찾아도 봄은 보이지 않아
짚신 닳도록 산봉우리에 구름까지 뒤졌네.
돌아와 미소 지으며 매화 가지 집어 코에 대니
봄은 이미 가지 끝에 잔뜩 담겨 있더라.”
- 비구니, 〈도를 깨닫다〉 전문
이른 봄에 매화꽃을 찾는 탐매 활동은 중국과 한국 문인들에게 일종의 유행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이 시의 화자 역시 이런 유행을 의식하였는지, ‘봄’을 찾겠다고 온 산을 헤맨다. 하지만 ‘봄’이란 무엇일까? 화자는 문득 깨달음을 얻고 빈손으로 돌아와 집 앞 매화 가지를 집어 든다. 우리는 화자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모르지만, ‘봄이 이미 가지 끝에 담겨 있다’는 대목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나도 눈앞에 있는 무언가를 놓친 채 헛되이 삶을 보내지 않았나 하고.
“시디신 매실즙은 이 사이에서 터지고
파초 잎은 푸른 가닥으로 나뉘어 비단 창에 어른거리네.
해가 긴 날 잠에서 깨어 멍한 채로
버들꽃 잡으려는 아이들 한가로이 바라보네.”
- 양만리, 〈초여름 잠에서 깨어〉 전문
여름은 왕성한 생명력의 계절이지만, 한시 시인들은 여름을 조금 다르게 보았다. 여름에 너무 더워서 정작 무엇을 할 기력이 없었던 경험은 누구나 있지 않은가. 한시 속 여름은 어딘가 정적이고 고요한 계절이다. 자연은 그 안에서 약동하지만, 인간은 상념에 잠긴다.
“성긴 꽃 짙은 향기 풍기는 섣달그믐날
낡은 사립문에 폭죽 터져 푸른 연기 흩어지네.
마을 아이들은 신나는 설날을 함께 즐거워하지만
베 휘장에는 늘 묵은 한이 서려 있네.
눈이 오려다 말고 구름도 물러가 개었는데
꽃은 놀라며 한 해를 전송하고 버들도 세월 재촉하네.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니 그저 슬프기만 하여
봄바람 대하고는 홀로 마음 아파하네.”
- 심의수, 〈계유년 제야에 애도하여〉 전문
한시는 때로 감정을 우아하게 표현한다. 이 시는 두 딸을 잃은 저자가 명절에 즐거워하는 마을 아이들을 보며 쓴 것이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슬픔을 “성긴 꽃 짙은 향기 풍기는” 봄 풍경 속에 담는다. 가슴 찢어지는 고통을 정연하게 글로 쓴다.
이런 문장들이 있는데, 그저 옛 시라고 치부하고 읽지 않는다면 얼마나 아까운가. 이것이 이 책 《시절한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