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 서나벌과 계림의 남북정치적 통합, 경주 〈사로국〉의 탄생에 얽힌 놀라운 이야기!
2세기 〈삼국지〉 시대에 조상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궁금증 단번에 해소!
치우천왕부터 문무대왕의 삼한일통까지 무려 3,500년에 이르는 아시아의 상고사를 다룬 대하역사소설 《고국》 9권 시리즈 중, 5권 〈한반도 정착〉 편이 출간되었다. 동부여와 최리의 낙랑국을 평정한 고구려의 대무신제는 이제 난하 서쪽으로 낙랑과 현도 후한의 2군을 제외한 요동 전역은 물론, 현 요하를 넘어 송화강에 이르는 광대한 강역을 장악하고 AD 55년경 조선하 일대에 남북으로 요동십성을 구축했다. 폭군 모본제는 두로에게 피살당하고, 6대 신명선제가 즉위해 사태를 수습한다. 나라를 안정시킨 태왕은 연해주 일대 조나, 주나 등을 평정해 고구려 강역의 표본을 다졌고, 아들인 태조에게 선양을 했다. 그러나 동부여 출신에다 선도를 국교수준으로 확장시킨 탓인지 왕력에서 제외되었는데, 태조의 재위기간이 95년으로 늘게 된 원인이었다.
서나벌과 백제는 요동을 떠나 반도의 중북부로 이주해 오지만, 이내 한강 중류 땅을 놓고 충돌한다. 다루왕의 백제가 한성을 차지하자 유리이사금의 서나벌은 충북까지 밀려나고, 사벌이 난을 일으켜 박씨 왕조를 되찾는다. 그 와중에 13년 〈백서전쟁〉을 치른 상주 일대의 서나벌은 황산강(낙동)을 놓고 가야와 충돌하던 중, 경주 일원에 자리한 탈해왕의 〈계림〉과 조우한다. 파사왕은 이내 원래 한 나라였던 양국의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고, AD 101년경 경주의 월성으로 천도하면서 통합 〈사로국〉을 출범시켰다. 이후로 경남일원의 가야 소국들을 제압한 사로국은 평화를 누리면서 벌휴왕의 석씨 왕조로 바뀌지만, 190년경 강성군주인 한성백제 초고왕에게 〈부곡대첩〉에서 참패한다.
중원의 후한은 광무제 사후 외척과 환관의 발호로 혼란에 빠져들었고, 변방 요동의 3태수들은 고구려를 노략질하기 시작한다. 172년경 명림답부가 이끄는 고구려군이 〈좌원대첩〉에서 후한군을 괴멸시켰고, 이는 10년 뒤 〈황건적의 난〉에 이어 중원 전체를 참혹한 백년전쟁 〈삼국시대〉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그 사이 선비 단석괴가 일어나 흉노가 떠난 초원을 차지했고, 베일에 싸인 왕조 위구태의 〈서부여〉(비리)는 고구려에 맞선다. 중원이 위, 촉, 오 3국의 각축전으로 좁혀지는 가운데, 하북의 맹주 원소를 꺾은 조조는 〈백랑산전투〉에서 답돈이 이끄는 오환족을 괴멸시킨다. 《삼국사기》는 1~2세기 중원과 다투던 북방민족의 역사를 소홀히 다루고, 신명선제와 사로의 사벌왕, 백제의 덕좌왕과 구지왕의 왕력을 누락시킴으로써 역사해석에 혼선을 야기했다. 많은 사람들이 명나라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에 열광하지만, 이것이 매번 북방민족에게 지배당한 한족의 열등감에서 나온 허구임을 알지 못한다. 《고국》 5권을 통해 왜곡된 삼국지의 실체는 물론, 동시대의 당당한 주역이었던 조상들의 생생한 역사를 제대로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