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계의 경계에 당도하여,
문을 밀어 열듯, 선을 넘어 입장하였어요.”
세계의 무한한 확장을 위해
비세계와 제정신세계를 경유하며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변선우의 첫 번째 시집『비세계』가 타이피스트 시인선 006번으로 출간되었다. 등단 당시 김혜순 시인, 조강석 평론가로부터 “소재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힘과 다층적 사유를 전개하는 역량을 지닌 신인”이라는 평을 받은 시인은 지금껏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형이상학적 시의 영역을 다루며, 우리가 사는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다세계를 선명한 감각과 충만한 개성으로 선보인다.
“나는 세계의 경계에 당도하여, 문을 밀어 열 듯, 선을 넘어 입장하였어요. 새하얀 세계, 금방 새카만 세계……, 새하얗기도 하고 새카맣기도 하는 세계가 펼쳐졌어요. 복판에 사람들이 있었어요. 살충제 마신 벌레들처럼 반지르르하게 널브러져 있었어요. 바라던 광경이었어요. 너무도 돌아왔어요.
-「비세계」 중에서
비세계의 주민들은 실신한 사람들이다. 의식의 저 아래, 혹은 무의식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자 신(神)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그리고 시인은 비세계의 관찰자이자 증언자로서 존재한다. 비세계는 ‘나’와의 관계를 통해서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비세계에서 눈을 돌려 “나”를 관찰할 때, 혹은 비세계라는 거울에 비친 “나”를 볼 때, “제정신세계”의 풍경이 드러난다. 선을 넘어 입장하기 전의 세계, 나의 인식과 감정과 표상 속에서 펼쳐지는 세계가 제정신세계다. 세계와 비세계와 제정신세계를 맞놓으면, 세계에 대한 삼면경(三面鏡)을 얻게 된다.
육교를 건넜다. 대교를 건넜다. 나만 걷고 있었다.
잠시 백기를 내려놓고 숨을 몰아쉬었다. 백기는 때가 타 있었으며, 나는 가까운 천에 가 백기를 빨았다. 그러자 백기는 사라져 버렸다. 물에 풀어져 버렸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을 떠올렸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 말을 떠올렸다.
-「제정신세계」 중에서
유머와 역설로서 그려내는
일인칭 자유연상에 의한 사실주의 부조리극
이 시집은 총 54편의 시와 1편의 산문으로 묶여 있다. ‘비세계’는 세계와 잇닿아 있는 세계, 세계의 “경계” 혹은 “표면” 너머에 있는 세계이다. “나는 이 세계의 경계에 당도하여, 문을 밀어 열 듯, 선을 넘어 입장하였어요”라는 전언처럼, 세계의 무한한 확장을 위해 비세계와 제정신세계를 경유하며, 무의식의 세계, 이데올로기가 설명하지 못하는 세계들을, 유머와 역설을 통해 11개의 다세계로 보여 준다.
나는 어제도 실패했고 오늘도 실패했으며, 내일도 실패할 예정이거든요. 그르친 일이 많거든요. 엎어진 일이 많아요. 내가 대신하여 엎질러졌어야 하는데, 몸은 늘 뒤늦거든요. 아닌 말로 기분이 앞서거든요.
-「딱딱한 연결 어지러운 마음」 중에서
입술을 오므린 내가 거울 속에 많아지자, 우리는 서로에게 실패를 말하기 위해 밀려온 느낌입니다.
-「게슈탈트」 중에서
“비세계란 세계의 부정어가 아니라 세계의 틈새를 벌리는 움직임의 이름”(김선오 시인)이며, 이 “균열”과 “확장” 속에서 변선우의 시는 역동적이면서도, 생각지 못한 무의식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변선우는 찢어짐으로서 정확해지며, “이탈한 유체처럼” 자발적으로 곤란을 맞이하면서도 폭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제 시인은 “비세계”와 “제정신세계” 사이를 가로지르며 우리를 향해 걸어온다.”(이기리 시인) 오랜 기다림 끝의 저 복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