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군묘지 앞에서’는 종군 체험과 더불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의 쓰라린 현실을 그린 연작시 〈초토의 시〉 중 하나인 8번 시의 부제로, 시인은 북한 인민군의 유해가 묻혀 있는 묘지 앞에서 전쟁의 상처를 보듬고 죽음의 의미를 아프게 되새긴다.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그래도 양지 바른 두메를 골라/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더욱 신비스러운 것이로다. - 〈초토의 시·8〉 일부
또한 전쟁의 상처로 상대에 대한 증오가 아직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던 때, 시인은 ‘원수’를 탓하지 않고 ‘세월’로 맞는다.
나 너를 맞노라/찢어져 피묻은 가슴/조각조각 흔들어/나 너를 맞노라.//여기는 나의 원수와/원수를 기르는 벗들이/마주 서는 곳/네가 나를 탓하지 않듯이/나도 너를 탓하지 않고/너를 세월이라고 맞노라. - 〈초토의 시·13〉 일부
그런가 하면 구상은 ‘정보수’가 된 자신의 꼴이 우습다고 말한다. “지금 생각하면/브래지어를 차고 여장(女裝)을 한 것보다/정보수(情報手)가 된 나의 꼴이 더 우습다.//내가 작성하는 모략선전문(謀略宣傳文)들을/순정(純情)의 혈서(血書) 쓰듯 했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곳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함께 그에 대한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분노도 시에 담았다.
내 가슴 동토(凍土) 위에/시베리아 찬바람이 살을 에인다.//말라빠져 엉켜 뒹구는 잡초(雜草)의 밭/쓰레기 구덩이엔/입 벌린 깡통, 밑 나간 레이션 박스,/찢어진 성조지(星條紙), 목 떨어진 유리병,/또 한구석엔 총 맞은 삽살개 시체, /전차(戰車)의 이빨 자국이 난 밭고랑엔/말라 뻐드러진 고양이의 잔해,// (……) /하늘이 갑자기/입에 시꺼먼 거품을 물고/갈가마귀 떼들이 후다닥 날아/찌푸린 산을 넘는데//나의 잔등의 미칠 듯한 이 개선(疥癬) -/나의 가슴을 치밀어 오르는 이 구토 -/어느 누구를 향한 것이냐?
-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36〉 일부
시인은 베트남전 현장도 찾았다. 다음은 이때 남긴 시다.
나는 어디서 날아온지 모르는/메시지 한 장을 풀려고/무진 애를 쓰다 돌아왔다.//꾸몽 고개 야자수 그늘에서/봉다워 바닷가에서/아니 사이공의 아오자이 낭자와/마주 앉아서도/오직 그것만을 풀려고/애를 태다 돌아왔다.//아마 그것은 베트콩이 뿌린/전단(傳單)인지 모른다.//아마 그것은 나트랑 고아원서 만난/월남 소년의 장난인지 모른다.
-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71〉 일부
문학평론가 김재홍은 “모든 것을 상실한 절망의 시대로부터 모든 것이 가능한 희망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구상 시인은 일관된 생성과 긍정의 시적 사유를 통해 비대립적 시 세계를 물려주었다”고 평한다. 대립의 관점에서 ‘어느 한 편’을 절대악으로 모는 것이 아니라 깊은 성찰과 반성을 통해 ‘모두의 편’이 되었다는 것이다.
구상은 전 지구적 위기 상황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시방 세계는 짙은 어둠에 덮여 있다./그 칠흑 속 지구의 이곳저곳에서는/구급을 호소하는 비상경보가 들려온다.//온 세상이 문명의 이기(利器)로 차 있고/자유에 취한 사상들이 서로 다투어/매미와 개구리들처럼 요란을 떨지만/세계는 마치 나침반이 고장난 배처럼/중심도 방향도 잃고 흔들리고 있다. -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100〉 일부
나아가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알라!”고 외친다. 서로 탓하고 미루다가는 인류의 종말이 오고야 만다는 것이다.
강대국부터가 핵폭탄을 만들고 실험하며/약소국에겐 금지하고 달래고만 있지만/그 언제 그 어느 곳에서 그 누가/버튼 하나 잘못 누르기만 하다면/인류의 종말은 어이없이 오고야 말리니// (……) / 오늘의 인간들은 한계상황에 이르고도/서로가 탓하고 서로들 미루기만 하니/이 일을 어쩌면 좋으랴, 어쩐단 말이냐?//오늘의 인간들이여! 그대들도/인간의 유한성과 상대성을 깨우쳐서/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며/두려움을 알라! 부끄러움을 알라!
- 〈창세기의 재음미〉 일부
이처럼 구상 시인은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동족상잔의 비극을 넘어 전인적 인간애와 평화를 추구한 선각자였다. (사)구상선생기념사업회 이상국 회장은 ‘발간사’에서 “신앙과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한 구도적 시각으로 문학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했던 “선생의 삶과 문학은 전인적 인간애와 평화를 지향”했다며 “시인은 가도 문학은 영원”하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