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40년간 한국 고대 금석문과 목간 연구에 매진해온 저자 김창호 교수가 연구 공력을 기울인 역작이다.
우리 삼국시대에 문자 사용을 보여주는 예는 고구려가 4세기 수막새에 중국의 연호 등을 새긴 것이 최초다. 이후 414년의 광개토태왕비, 458년경의 충주 고구려비, 491~500년 사이에 세워진 집안 고구려비 등이 있다. 반면 백제는 4~5세기의 금석문은 없고, 503년경의 양관와위사의(梁官瓦爲師矣)와 512년의 무령왕릉 연도 폐쇄석전편(閉鎖石塼片)이 있을 뿐이다. 백제 칠지도(七支刀)의 연대는 일본학계의 주장처럼 369년이 아닌 5세기 후반으로 보아야 한다. 신라는 5세기의 황남대총 북분의 부인대명(夫人帶銘), 441년의 포항 중성리비, 443년의 포항 냉수리비, 458년의 경주 금관총 명문 등이 있다.
지금까지 고구려에서는 금석문만 있고, 목간은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다. 백제에서는 금석문과 목간이 모두 출토되고 있지만, 목간은 한성시대나 웅진시대의 예는 없고, 사비시대 예가 있을 뿐이다. 사비성에서 출토된 것은 100점 이상이나 되어 경주의 목간 수를 넘어서며, 앞으로도 목간은 더 출토될 가능성이 있다. 고신라시대 왕경의 목간 수는 통일신라시대의 월지를 합치면 사비시대와 거의 비슷하다. 경주의 경우 왕경에서 목간이 출토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고신라의 금석문 수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많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우리 고대의 목간 하면 지방 목간으로는 함안 성산산성 목간을 들 수 있다. 그 수가 253점에 달해 백제나 고신라의 어느 유적보다 많다. 그 제작 연대와 사용 용도 등은 학계에서도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데, 저자는 7쌍의 쌍둥이 목간 글씨체가 다 달라서 하찰로 사용된 것 외에 1부를 도착지인 성산산성에서 더 만들었고, 역역용과 하찰용 모두를 장부로 사용했다고 보았다.
대구 팔거산성 목간은 목간 자체로 볼 때, 6세기로 보면 초축 때에는 목간이 없고, 60년이 지나 목조 집수지를 만든 것이다. 금석문으로 미루어보건대, 팔거산성 목간의 연대는 480년대로 보았다.
백제의 인각와는 보통 암키와 혹은 수키와의 凸면에 방형 혹은 원형의 도장을 눌러서 만든 것인데, 현재까지 2,857점이나 확인되었고, 주로 사비시대의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나 고신라의 문자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백제의 토착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보았다.
금석문 자료는 백제의 경우 6세기 들어와서야 보이는데, 광개토태왕비 같은 국가 차원의 금석문은 없다. 반면 신라는 중성리비, 냉수리비, 봉평비, 적성비, 창녕비, 북한산비, 마운령비, 황초령비까지 8기나 된다. 백제 비석으로는 사택지적비가 유명한데, 도교사상을 내포한 글로 문장은 대단히 어렵다. 이것 외에는 비석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다.
신라의 금석문을 5세기로 보는 전거가 되는 것으로 경주 금관총 출토 이사지왕(尒斯智王)이란 명문이 있다. ‘尒斯智王’은 훈독과 반절로 넛지왕(458년 사망)이 되고, 이는 마립간시대 왕들 가운데 눌지마립간과 같다. 따라서 금관총의 제작연대를 458년, 포항 중성리비와 포항 냉수리비의 연대도 각각 441년, 443년으로 보았다. 통일신라가 가까워지던 567년 북한산순수비부터 불기 시작한 어려운 한문 열풍은 568년 마운령비와 황초령비를 거쳐서 662년 태종무열왕릉비, 682년 문무왕릉비에 이르면 절정에 달한다. 이 비문들은 내용이 너무 어렵고, 역사적인 생활사의 복원에는 한계가 있다.
저자는 신라 금석문 연구에서 또다른 큰 문제로 냉수리비의 ‘沙喙部至都盧葛文王’에 근거해 신라 중고대의 왕 가운데 실성왕과 눌지왕의 출신을 탁부로 보고, 법흥왕 역시 탁부로 보면서 지증왕은 사탁부 출신으로 본다는 점을 들었는데, 왕이 갈문왕을 칭한 유일한 예다. 원래 탁부는 왕족, 사탁부는 왕비족이다. 종래 문헌사학자들은 모량부를 왕비족으로 보아 왔다. 그런데 지증왕이 사탁부 출신이라면 그의 아들인 법흥왕 역시 사탁부 출신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봉평비에는 탁부 출신으로 나온다. 봉평비에는 법흥왕의 동생이라는 입종갈문왕까지 사탁부로 나온다. 봉평비의 사부지갈문왕은 울주 천전리서석 추명에서의 입종갈문왕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져 지증왕의 사탁부 출신설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 새로운 자료의 출현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또한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리에 위치한 사적 제427호 부여 왕흥사는 백제의 대표적인 왕실사찰이다. 2007년 목탑터에서 발견된 왕흥사지 사리기에는 백제 창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丁酉年 二月 十五日’에 절을 창건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정유년이란 간지로 577년이라는 절대연대를 갖게 되었다. 종래 왕흥사 목탑은 무왕 즉위 1년(600)~무왕 35년(634) 사이에 건립되었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 절대연대는 문헌기록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 점은 문헌을 중심으로 한 연구의 한계를 밝혀주는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저자는 금석문 연구의 가장 큰 장점으로 문헌자료 비판의 잣대가 된다는 점을 꼽는다. 실제로 광개토왕비, 냉수리비, 적성비, 진흥왕순수비 등에 대해서는 문헌자료 어디에도 언급이 없다. 문헌자료의 한계로 여기저기 틈이 나 있는 한국 고대의 역사상을 금석문과 목간 같은 당시의 자료가 보완해줌으로써 새롭게 맞추는 데 이 책이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