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서정으로 건너가는 삶의 시학
푸름이 절정으로 가는 시간에 서정희 시인의 세 번째 시조집 『그대가 있기에』 원고를 펼쳐 들고 시인의 맑고 순수한 감성 속으로 스며들기로 한다. 그리고 정형의 틀에서 정직함을 잃지 않는 행간에 새겨진 얼룩 같은 삶의 여정도 엿볼 수 있는 시편도 몇 편 만난다.
1. 수채화 빛으로 건너가는 맑은 감성의 노래
먼저 순수한 감성으로 노래하는 깨끗한 목소리가 담겨있는 시편을 살피자면, “산천이 춤을 추고”있는 가운데 “유순한 맘이 되어 만면에 미소”를 띄게 하는 심성을 “메마른 그대 가슴 풍족히 적시고” “하늘까지 닿도록” 대지의 울림으로 다가올(「기다리는 비」)와 “흙먼지 폴폴 이는 낮은 곳 채송화가 미소” 지으며 높은 곳의 (「해바라기」)를 올려다본다. 세상에 우뚝 서서 발아래를 바라보는 (「해바라기」)는 참으로 낮은 곳에서도 하느님의 말씀 구절처럼 채송화 “색색마다 올망졸망” 여름 내내 “앙증스레 앉아” 마치 해맑은 찬송가를 부를 것만 같다. 이처럼 티 없이 맑은 찬송가를 부르게 할 수 있게 하는 힘은, 순수한 감성이 배여 있는 다음 작품에서 더욱 진하게 엿볼 수 있겠다.
푸름은/ 더 푸르고/ 붉음은 더 붉어진
비 온 후의 정경들/ 산과 들판 꽃들이
마음껏 치장하는 중/ 새도 깃털 펼친다
두둥실/ 뭉게구름/ 빙그레 내려웃고
비단 같은 바람결에/ 촉촉한 잎사귀들
뽀송한 얼굴 배시시/ 해갈함의 미소여
밤사이/ 비바람에/ 능소화 꽃잎 날아
자갈밭에 누워 있네/ 서러움 어디 가고
새로이 피는 꽃송이/ 불끈 힘이 솟는다
- 「참 좋은 날」 전문
위 작품 (「참 좋은 날」)은 그야말로 한 편의 수채화를 그려놓은 듯이, 시인의 맑은 감성이 하늘거리는 작품이다. “비 온 후의 정경들”을 맑은 마음을 가진 시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는 “푸름”과 “붉음”이 어우러진 “산과 들판”엔 온갖 꽃들이 피어 있고, “두둥실” 떠 있는 “뭉게구름”과 세상을 촉촉이 또는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비단 바람”이 있다. “밤사이 비바람에” 떨어져 “자갈밭에” 고이 누워 있는 능소화를 보며 밤사이 스쳐 지나간 비바람처럼 지난날의 상처를 딛고 “새로이 피는 꽃송이”가 되어 불끈 솟는 힘으로 희망을 노래한다. 이것은 시인의 따뜻한 감성에서 오는 미래지향적인 꿈이라고 할 수 있다. 미래를 열어가는 꿈은 (「빛나는 계절」)과 (「물망초」)에서도 소망하고 있다.
2. 정직함을 건너가는 단단한 삶의 여정
사람이 살아가며 정직함으로 일관되게 살아가기는 무척 힘든 여정이다. 그러나 시인의 시편에서는 정직하게 살아온 기록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시인이 기록한 행간에서 단단한 삶의 여정이 눈부시게 찬란하다. 가고 없는 “반가운” 얼굴이 문득 그리워 무심코 전화번호를 눌러보면 전화기 저편에서 금방이라도 “여보세요”라며 들릴 것만 같은 엄마의 목소리가 담긴(「지울 수 없는 번호」)라든가, “문간에 어른대며 비비적대던 냥이 도무지 기척 없고 밥그릇만 휑하게” 놓인 자리에 “달맞이꽃 삐약댄 병아리처럼 올망졸망 앉은 자리”(「비 오는 여름날의 풍경」)에는 추억의 앨범처럼 펼쳐져 있다. “적은 것 가지고도 알뜰히 쪼개시던” 어머니의 조각보처럼 “금보다 귀한 것이” (「풍요한 마음」)으로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그 때의 오늘” 바로 총소리와 화염으로 뒤덮힌 1950년 (「유월 이십오일」)에도 “산과 들엔 예쁜 꽃들 방싯대었으리라” 방싯대는 꽃자리에 “초연에 휩싸인 채 암흑 속에 빠져”들어 꽃의 웃음은 사라졌다. 오로지 남은 것이라고는 “광활한 벌판에서” 들려오는 목이 쉰 통곡 소리 같은 사랑이 예기치 않게 이별을 통보하고 말았다. 오래된 이별의 뒤안길에도 매년 유월만 되면 “싸리꽃 백리향이” 분단의 “슬픔을 모르는 채” 아리고 아린 마음이 응축된 채로 진하고 진한 “향기를 드날”리고만 있다. 시인은 진토된 넋의 노래로 울부짓는다. 애환의 통곡도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처럼 대대손손 이어가듯, 시인도 그렇게 세상의 시편으로 행간 속을 걸어가는 중이다. 가끔은 다음 시편처럼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쉬었다 가는 인생을 맛보기도 한다.
스산한/ 바람줄기/ 먹구름 몰고 오니
태울 듯 쏘던 땡볕/ 순식간에 숨는다
후두둑 돋는 빗방울/ 시원스런 빗줄기
길 가다/ 언덕받이/ 오르다 숨이 차면
떡갈나무 참나무잎/ 호흡을 맞처준다
말 없이 주는 상큼함/ 가슴속에 스미고
계곡을/ 타고 흐른/ 물소리 숲을 깬다
세상줄 놓친 그 벗/ 이 청량감 느낄까
챙 넓은 바위 밑에서/ 소나기를 피하네
- 「쉬었다 가자」 전문
위 작품은 걸어온 우리 인생이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한다. 지난한 인생을 들여다 보면 무상無想하고 유상有想하다. 그리고 유상有想하고 무상無想하다. 가진 것 없이 태어나 하나씩 가지게 되고, 풍요롭게 가졌지만 떠날 때는 모두 빈손이 된다. 존재론적 실존과 비존재론적 실존이 항상 도처到處에 놓여 있듯, 시인의 마음에 항상 함께 있다. 시인이 사유한 문장을 독자가 복용하고 치유한다. 그러므로 서정희 시인의 문학은 사유의 힐링병원이다.
3. 서정과 인생 여정의 문을 나가며
서정희 시인의 이번 시조집은 맑은 감성으로 오래도록 건너온 푸른 숲속의 문학 병원이다. 이곳에 입원한 독자는 언제나 맑은 계곡의 물소리처럼 푸른 서정이 흘러, 세상을 보다 따뜻하게 풍요롭게 할 것이다. 서정희 시인의 힐링 처방전을 기다리는 시조집 『그대가 있기에』 가능하다. 앞으로 서정희 문학 병원이 더욱 번창하기를 기원한다.
2024년 10월
임성구(시조시인 ·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