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지냈던 얼굴, 지키지 못한 약속, 어느새 사라진 꿈
아릿하게 찬란했던 지난날들……
잠시 멈춰 서 뒤돌아보는 당신에게 최영미 시인이 전하는 한 페이지의 휴식과 위로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나온 날을 뒤돌아보게 된다. 과거가 후회스럽거나 현재가 만족스럽지 못한 탓 혹은 미래가 막막한 탓일 수도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 멈춰 서 시간을 더듬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최영미 시인은 시를 통해 거침없이 사회를 비판해 왔고 문단 미투 운동의 문을 열어젖힌 뜨거운 존재다. 동시에 “풍자보다 사랑이 좋지/ 세상을 바꾸는 건 풍자가 아니라 사랑”(「편집회의」)이라고 단언하는 사랑의 시인이기도 하다. 그토록 ‘불과 꽃 같던’ 젊은 날을 지나온 최영미 시인은 세월의 무게 속에서 이제 “중년을 훌쩍 넘긴 내게 삶은 느리지 않고 희망도 강렬하지 않다”라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최영미 시인은 더욱 깊어진 시선으로 여전히 시를 읽고 쓰며, 시에 얽힌 삶을 전한다. 그러한 시인의 진심을 담은 시선집 『나에게 영혼을 준 건 세 번째 사랑이었지』가 출간된다. 2022년 1월부터 2023년 12월까지《조선일보》에 인기리에 연재했던 명시 소개 칼럼 ‘최영미의 어떤 시’ 중 특별히 아끼는 시 53편을 선별해 엮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삶에 대한 사랑을 북돋아주는 명시들
이 시선집에 실린 시들은 공간적으로는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고, 시간상으로는 수천 년을 넘나든다. 최영미 시인의 폭넓은 안목을 엿볼 수 있는 각 시에는 시인의 감상과 해설을 더했다. 삶에 대한 미련을 솔직하게 고백하거나 때론 세월의 무상함을 딛고 우뚝 일어나는 시인의 담백한 해설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또한 시에 얽힌 에피소드와 시인의 생애, 시의 형식에 대한 설명을 더해 독자들이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시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최영미 시인은 특유의 예리한 감수성으로 직접 영시(英詩)를 번역하는 만큼, 번역 과정에서의 고민도 해설에 녹여내 시 읽기의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이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하루 종일 내 사랑과’에서는 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인 사랑과 이별을 다룬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 『시경(詩經)』에 실린 「매실을 따고 있네요」부터 오늘날 주목받는 한국 시인 황인찬의 「무화과 숲」까지, 수천 년 동안 사랑을 북돋아준 시들을 만나볼 수 있다. 2장 ‘지난 시절은 돌아오지 않아도’는 이번 시선집의 메시지가 응축되어 있는 장이다. 알프레드 테니슨의 「참나무」와 허영자의 「감」 등을 통해 나이 듦의 의미와 가치를 엿볼 수 있다.
3장 ‘적당한 고독’에서는 밖으로 발설되지 못하고 내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을 다룬 시들을 소개한다. 김남조의 「허망에 관하여」 등 개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을 다룬 시뿐 아니라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 남은 자의 슬픔」 등 험난한 시대를 살아가며 느끼는 괴로움을 고백한 시까지, 인간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의 결을 느껴볼 수 있다. 4장 ‘가장 좋은 것’에서는 거창하지 않은 시어(詩語)를 사용해 평범한 하루의 찬란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한 시들을 만나볼 수 있다. 김경미의 「봄에 꽃들은 세 번씩 핀다」와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누가 바람을 보았을까」 등의 시는 일상에서 시적 순간을 발견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본문에는 클로드 모네의 그림을 실어 시각적 재미를 더했다. 모네는 나이가 들어 백내장을 앓게 된 상황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수많은 그림을 그려냈다. 모네의 예술가적 고집은 “지금은 그때처럼 정의에 민감하지 않”다면서도 여전히 시를 통해 세상과 열렬히 소통하려는 최영미 시인의 노력과 닮아 있다. 또한 사물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모네의 그림은 마치 흐릿한 기억 속 아릿한 지난날의 풍경처럼 다가와 시 읽기에 풍미를 더해줄 것이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한 편의 시를 음미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의 의미가 희미해지거나 자신의 괴로움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시가 필요하다. 누군가 다시금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용기라면 시는 그에게 용기를 줄 것이고, 슬픔이 필요하다면 슬픔을, 사랑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나에게 영혼을 준 건 세 번째 사랑이었지』에서 내 영혼에 진정으로 필요한 ‘세 번째 사랑’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