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 『검은 자화상』
전쟁의 기억과 격동의 시대 속에서 무너진 검은 얼굴들
1991년 발표된 하근찬의 최후기 장편소설 『검은 자화상』은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각각 다른 시간대에 놓인 세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태평양전쟁, 한국전쟁을 거쳐 민주화, 산업화의 기로에 놓인 한국 사회가 되기까지 혼란스러운 상황을 ‘병칠’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검은 자화상』이 발표된 1980년대는 민주화에 대한 좌절과 희망이 사회를 뒤덮고 있던 시대였다. ‘병칠’은 사랑하는 연인을 친척인 ‘두성’에게 빼앗긴 후, 남과 북의 두 이데올로기가 충돌하는 동안에도 연인 ‘선애’를 되찾기 위한 집념을 저버리지 않는 인물로 묘사된다.
분단으로 인한 두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작품의 전면에 부각되어 있기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의 장치일 뿐이다. 내용은 한 여자를 두고 두 혈육이 목숨을 걸고 부딪치는, 말하자면 애증의 극한상황을 다루었다고 할 수 있다. 첫사랑을 끝내 포기할 수 없는 한 남자의 집념이라 할까, 열정이라 할까, 그런 원색적인 애정을 형상화해 본 셈이다.
남녀 간의 애정이 자칫 이기적으로 흐르고, 그 질감이 희박해져가고 있는 요즘 세태에서는 극히 보기 드문 한 인간형을 이 소설 속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첫사랑을 위해서 자기의 인생을 던지다시피 한 주인공을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그 반응이 궁금하다.
-하근찬, 『검은 자화상』 ‘작가의 말’ 중에서
『검은 자화상』은 세 개의 이야기가 중첩되어 있는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가장 바깥에는 신문기자 중현과 아내 혜선이 고향을 방문하는 이야기가 놓여 있다.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로부터 시작되는 병칠과 선애의 이야기가 작품의 중심 서사로 가장 안쪽에 놓여 있다.
국민학교 6학년인 병칠은 전학 온 선애와 연인이 된다. 하지만 병칠이 일본 규슈로 일하러 간 동안 선애는 병칠의 육촌 형인 두성과 혼인을 하게 된다. 병칠이 일본에 있는 동안 선애는 ‘데이신따이(정신대)’ 징집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어려운 집안 형편을 고려하여 부농 집안과 혼인을 한 것이다. 병칠은 선애가 혼인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분노하기보다는 두성에게 적개심을 품고 선애를 되찾겠다는 집념으로 살아간다. 한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병칠과 두성은 남과 북의 두 이념 휩쓸리고, 두 인물의 갈등은 절정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