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존하는 허상들의 지옥
[가시] 살아남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실존하는 허상의 가시라면 더더욱
-「10장」에서
『백합의 지옥』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백합’처럼, 이 시집이 펼쳐 보여 주는 지옥에는 ‘허상’들이 가득하다. 최재원 시인이 시를 통해 보여 주는 ‘허상’은 우리가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믿는 개념들이다. 기하학의 ‘삼각형’이나 ‘점’처럼 건물을 세우고 우주여행을 만드는 기술에 쓰이지만 실제로는 ‘근사치’일 뿐인 허구의 개념들, 그러나 실존하는 사물들보다 더욱 진실로 믿어지고 통용되는 것들이다. 『백합의 지옥』을 여는 첫 번째 이야기 ‘목련나무 아래에서’의 ‘가시’는 이런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는 “실존하는 허상”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가진 “실제의 뾰족함”에 위기감을 느끼고, 누군가를 찌르고 죽일 수 있는 자기 능력에 절망한다. ‘가시’의 고백으로부터 지옥의 입구가 열린다. 그 지옥은 시작과 끝이 없는 “무형의 행렬”, “허수의 계단”을 오르는 길과 미로, “추상”을 통해 자유로워지는 장소다. 『백합의 지옥』은 바로 이곳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 믿은 ‘실체’를 잃어 보기를 권한다. 뾰족함과 단단함을 잃은 ‘가시’처럼 자유로운 ‘추상’이 된 우리 자신을 다시 바라보기를.
■ TV쇼처럼 펼쳐지는 지옥도
깜깜한 바닥에 닿았다
바닥이 꿈틀거렸다
-「바다의 바닥」에서
『백합의 지옥』은 80여 편, 432쪽 분량의 방대한 시를 9개의 부로 나눠 구성되었다. 각각의 부를 서로 다른 인물과 이야기로 명확히 구분해 채워 놓은 시인의 의도에 따라 『백합의 지옥』 속 이야기들은 마치 쉴 틈 없이 주의를 잡아끄는 TV쇼처럼 다채롭게 펼쳐진다. 블랙홀 살해 사건을 추적하는 ‘목련나무 아래에서’, 아름다운 이의 얼굴에 밀착해 미세한 색깔들을 하나하나 탐닉하는 ‘geodesics’, 애니메이션처럼 바닷속 동물들이 함께 모험을 떠나는 ‘별늪’을 지나 ‘소년의 가죽’, ‘세상의 죄를 사하는 백숙’을 열면 우리의 일상과 마음이 낱낱이 펼쳐진다. 이 일상 끝에 ‘목련은 죽음의 꽃’이 펼쳐진다. 160쪽이라는 압도적인 분량으로 다섯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지는 이 단 한 편의 시는 그 자체로 ‘죽음’ 같다. 그러나 『백합의 지옥』은 ‘죽음’ 이후로도 우리 일상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미 죽어 도착한 지옥에서는 죽음으로 이야기를 끝낼 수 없으므로. 이제 이야기는 어디로 흘러갈까? 죽음 이후에도 상실은 두렵고, 몸은 수치스럽고, 타인에 대한 적의가 멈추지 않는다면. 최재원은 죽음을 넘어 이 지옥의 끝까지 우리를 데리고 간다.
■ 오직 우리 여럿
여기는 아무도 없잖아 오직 우리 여럿
-「geodesics」
경계의 지워짐, 표면과 내면의 뒤섞임 혹은 뒤바꿈은 최재원의 시가 가장 능수능란하게 보여 주는 변신이자 역동이다. 첫 시집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에서는 신체의 가장 바깥인 피부의 감각,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을 통해 ‘경계’에 대한 독특한 사유를 보여 주었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한 사람의 내면에 깃든 여러 마음의 겹들을 포착한다. 하나의 마음을 겹겹이 싸고 있는 겹과 경계, 그 사이사이에 빼곡히 들어 찬 ‘이물’과 ‘타자’를 들여다본다. 「목련은 죽음의 꽃」은 한 사람의 내면에 있는 ‘광장’ 혹은 ‘극장’ 같은 공공의 장소를 펼쳐 보여 주는 독특한 시다. 장례식장에서 죽음을 생각하다가 죽음처럼 외로운 자신의 삶을 생각하는 ‘불법 자라’의 독백을 시작으로, 네 개의 목소리가 따라 등장한다. 장례식장에 틈입한 ‘목련의 향기’처럼 급작스럽게. 다섯 목소리는 각자의 말을 한다. 혼잣말하는 듯하다가도 서로의 말을 이어 부르는 노래처럼 따라 하고, 일시에 침묵하다가도 합창하듯 소리를 내지른다. 최재원 시인은 이 목소리들로 죽음만큼 고독한 이의 내면의 풍경을 바꾼다. 이제 그곳은 단 한 사람의 위축되고 어둡고 텅 빈 장소가 아니다. 한 사람에게 깃든 다른 누군가, 그 누군가로부터 내면에서 새로 태어난 또 다른 누군가가 서로의 말을 주고받고 공명하고 울려 퍼지며 차오르는 동시에 점점 커지는 목소리들의 집이다.
■ 본문에서
시작과 끝 없이
솟는 무형의 행렬
이름을 몰라
볼 수 없고
이름만 알아
볼 수 없는
우리는 함께
가시를 삼킨다
허수의 계단을 오르리라
추상에서 너는 자유로우리니
상징에 불과한 자유를 거부하고 우리는
하염없이 내려가는 계단을 오르리라
-「11장」
은하수라는 이름의 은하수와
마그마라는 이름의 마그마는
첫눈에 서로를 이해했다
마그마는 점점 은하수로 흘러들었고
은하수는 점점 마그마로 흘러들었고
태양빛 마그마와 은빛 은하수는 꿀빛 별늪이 되어
-「별늪」에서
영원, 안녕
오늘은 너의 이름을 깜빡했어
엄숙한 마음을 그만뒀어
돈 주고 살 수 없는
늪의 괴물 천사
-「영원의 다른 이름은 없나요」
나를 추방하지 말라
이물을 내쫓지 말라
깨끗해지지 말라
그만두라 그러나
(…)
부드럽게 밀며 섞는다. 밀며 섞는다. 의혹도 사죄도 빈틈도 없는 움직임. 빙글빙글 돌린다. 둥글게, 부드럽게, 부드럽게. 부드럽게. (…) 무겁고 견고하게 영속의 몸을 갖추어 간다. 무구의 막은 쫄깃하고 영악하다. 살아 있는 세 가지 몸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불순물.
-「기브앤테이크」에서
오직 잠시 머물기 위해서
작게 조금씩 섞는다
밤과 새벽과 너와 나
같은 색깔이 될 때까지
회색에 회색을 찍는 붓끝
네가 있어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초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