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전투에 대한 최초의 단일한 종합연구서 / 국지적인 ‘우금티전투’가 아닌 전면적인 ‘공주전투’ / 일본군의 조선침탈을 저지한 전투 / 일본군의 제노사이드 현장 / 명백한 항일전투로 항일의병전쟁의 시발점 / 남북접 연합 동학농민군이 참전한 본격적인 전투 / 각계각층의 민족이 참전한 항일민족연합전선의 전투 / 공주전투의 위상 재조명을 통해 동학농민혁명 전체 이해를 새롭게 할 수 있게 돼
동학농민혁명은 2023년에 그 관련 기록물이 세계 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됨으로써, 인류사적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 책은 세계 유수한 혁명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갑오년의 동학농민혁명 당시 최대 전투이며, 혁명의 운명을 갈음한 결정적인 전투였던 ‘공주전투’의 역사적 실상을 촘촘히 재구성하면서 그 의의를 재조명하고, 조선의 운명을 갈음하였던 구체적인 흐름, 그리고 동아시아 근대사에 미친 영향을 밝혀낸다. 이 책의 의의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열거할 수 있다.
첫째, 이 책은 ‘공주전투’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쓰면서, 왜 이것이 1894년 11월-12월 사이에 전개된, 공주 일원에서의 동학농민혁명 최대 전투를 지칭하는 바른 이름인가를 제시한다. 즉 공주전투는 주력군의 진격로인 우금티 일대만이 아니라, 공주부성을 둘러싼 사방의 진격로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는가 하면, 정규전과 유격전을 병행하고, 공주 인근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공주 진격 전투와 연계한 대소규모의 전투가 동시 다발적으로 전개된 복합적이고, 장기적이며, 다면적인 전투였음을 밝힌다.
둘째, 이 책은 공주전투가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진압 계획과 한반도 장악 계획을 파탄 직전까지 몰아간 ‘성공적인’ 전투였음을 논구하였다. 공주(우금티)전투가 동학농민혁명에서 최대 규모의 전투였으나, 최대의 희생자를 내고, 동학농민혁명의 실질적인 ‘실패’를 결정한 전투로서 이야기되는 일반적인 평가를 전복한다. 즉 당초 일본군의 동학군 진압 작전에서 공주는 일박하는 경유지에 불과하였으나, 동학농민군은 이 전선에서 22일간에 걸쳐 전투를 벌이며 일본군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또한 공주전투는 공주를 둘러싼 전투일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각 지역별로 전개되고 있던 동학농민군들의 대소 전투와 연계를 맺는 가운데 진행되었다는 점을 말해 준다.
셋째, 공주전투는 일본이 제국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저지른 조선 민중에 대한 본격적인 최초의 제노사이드(학살) 사건이었다. 이는 일본군이 경복궁 침탈 사건을 기점으로 하는 ‘조일전쟁(朝日戰爭)’을 도발한 이래 궁극적으로 식민지화를 염두에 두고, 항일의 씨앗이 될 동학농민군과 그 추종세력을 발본색원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주모자 색출과 주력부대의 궤멸과 몰살을 기도한 사건이다. 이것을 “동학교도에 대한 처치는 ... 향후 모조리 죽일 것”이라고 하는 일본군 대본영의 명령서가 증명하고 있다. 공주전투 기간 중에도 일본군의 대량 학살은 곳곳에서 자행되었음을, 증언 자료를 통해 밝히고 있다.
넷째, 제2차 동학농민혁명 봉기의 정점에서 치러진 공주전투는 명백한 항일전투이자 조선의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독립전쟁이었다. 이는 공주전투에 임한 남북접 동학농민혁명군이 일본군의 경복궁 침탈에 대한 항의와 일본군의 철병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해월 최시형의 총기포령에 따라 봉기하고, 공주전투를 시작으로 한반도 남쪽 끝까지 밀려나가면서도 항전을 계속했던 데서 드러난다.
다섯째, 공주전투는 남접과 북접 동학농민군 및 공주 지역 토착 동학농민군이 연대하여 치러낸 전투이다. 일반적으로 공주(우금티)전투는 전봉준의 ‘남접’(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을 위주로 한 전투로만 이해되지만, 전봉준 휘하 남접 동학농민군의 2배 가까운 6~7만 명의 북접 지역(충청도와 경기도 등) 동학농민군이 북접통령 손병휘의 지휘하에 참전하여 큰 전과를 거두고, 대세가 기운 이후에는 전봉준군과 더불어 임실 지역까지 후퇴한 역사적 사실로써 확인할 수 있다. 공주 지역 출신 동학농민군은 ‘양반’ 출신이 이끄는 유생부대가 참전하고, 지리에 밝은 이점을 이용한 유격전까지 벌인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동학농민군의 전투를 지원하는 차원에서 공주 인근 지역의 마을 사람들이 병참 지원(식량 조달)에 나서는 등, 민족연합전선이 형성되어 전투를 전개하였다.
여섯째, 공주전투에 임한 동학농민군은 결국 패배하고 말았으나, 22일간의 전투 기간 동안 조직적이며 결사적으로 항쟁하였다. 전봉준 휘하 농민군은 1차 봉기 이래의 다양한 경험을 쌓았고, 특히 ‘살림의 군대’로서 군율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자긍심을 내면화한 혁명군이었다. 또한 손병희 휘하의 농민군은 신앙적으로 더 깊이 단련된 내면적 역량을 바탕으로 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전투에 임하였다. 그러기에 압도적인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40~50차례의 돌격전과 10여 차례의 육박 혈전까지 다양한 전투를 장기간에 걸쳐 치러냈으며, 일시적인 패배 이후에도 급격히 해산하지 않고, 장소를 옮겨가며 전투를 계속하였다.
공주전투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보다 각계각층이 대동단결하여 반일 민족자주 수호 전쟁을 수행하였다는 점이다. 전투에 임한 3대 세력은 남접 농민군, 북접 농민군과 함께 공주 지역의 토착 농민군도 합세하였다. 또한 공주전투가 일방적인 패배로 귀결된 싸움이 아니라, 압도적인 무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장기적, 조직적으로 응전하였던 본격적인 전투였으며, 참전한 농민군들이 경험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상당한 정도로 무장되었던 혁명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공주전투 실상을 바탕으로 동학농민혁명이 한편으로는 무장독립운동론의 연원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 비폭력무저항운동이었던 3.1운동으로 계승되었다는, 이중적 성격을 종합하고 있는 우리의 자주적 근대민족운동사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