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 : 이 열차의 비상브레이크를 누가 당길 것인가?
탄핵 가능성이 집권 이후 가장 높아진 시기인 2024년 10월, 대통령은 범우사에서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며 한국 사회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이 폭주 기관차의 비상 브레이크를 스스로 당기기를 거부했다. 비상벨의 경고음이 사회 곳곳에서 들린 지 오래인 데도 말이다. 사람들의 삶을 정신적, 신체적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 기관차의 폭주는 한국에 특유한 현상이 아니다. 『폭풍 다음에 불』은 열차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인지를 질문하면서 시작된다. “기차는 더 빠르게, 더 빠르게 밤을 향해 질주한다. 어디로 가는 걸까?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강제 수용소로? 핵전쟁으로? 팬데믹의 연속으로?”(20쪽)
지금처럼 계속 달리면 위험하다는 위기의 징후들은 많았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의료 위기, 폭염, 자영업자 위기, 동물 멸종, 물가 폭등, 기후 재난, 복지 예산 삭감, 홍수, 디지털 성폭력, 산불, 가계부채 폭증, 오염수 방류, 혐오 범죄, 블랙리스트, 빈부격차 ... 그리고 핵전쟁. 홀러웨이는 이 기차의 종착역을 가리키는 푯말이 점점 더 선명하게 깜빡이고 있다고 쓴다. 도착역의 이름은 “멸종”이다. 희망은 있을까?
희망의 현 상태 : “그래, 알아. 그런데 뭐 어쩌겠어?”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구절을 읽고 공감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런 시대에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폭풍 다음에 불』의 저자는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전쟁터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 사회적 참사의 진상이 규명되지 않는 것, 책임자들이 처벌받지 않는 것, 법이 돈과 권력의 소유 여부에 따라 차등 적용되는 것, 필수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열악한 조건 속에서 착취당하는 것, 원전 오염수 방류를 막지 못하는 것 ... 사람들은 이 모든 것에 분노한다. 우리 시대에 이는 세계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이다.
홀러웨이는 분노와 희망이 서로 분리되는 것이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럴 때 희망은 “어, 별로 안 좋겠는데” 정도로, 또는 “우리 못 본 척해도 다 잘될 거야”로 희석되거나 질식사하고 만다. 분노하는 이유는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분노와 희망이 분리되면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분노했던 것을 그냥 받아들이게 된다. 끔찍한 소식들을 읽고서 어쩔 수 없다고 어깨를 으쓱한 후 곧장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이다. “구걸하거나 길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을 보고 우리는 다른 곳을 쳐다본다. 우리의 분노는 도덕적 불편함으로, 죄를 지었다는 불편한 죄책감으로 된다.”(26쪽) 이런 태도는 우리가 알다시피, 그 문제를 야기하는 체제적 힘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 것이다. 홀러웨이의 말처럼, 이럴 때 희망은 “그래, 알아. 그런데 뭐 어쩌겠어?”가 된다.
우리는 희망을 다시 배워야 한다 : 희망은 “좋을 텐데”가 아니다
희망을 말하기 위해 홀러웨이가 참조하는 사람은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세 권의 대작 『희망의 원리』를 출간한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다. 블로흐는 동화, 춤, 음악, 문학, 종교 등 모든 종류의 인간 활동에서 희망의 중심성을 보았다. 그는 그 속에 다른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추구가 있다고 보았다. 블로흐가 희망을 말했던 20세기 중반과 비교해서 오늘날이 더 희망적이라고 홀러웨이가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홀러웨이는 블로흐가 가질 수 있었던 자신감은 오늘날에는 어려운 것이라고 말한다. “... 세계 곳곳에서 파시즘이나 파시즘에 가까운 것이 대두되고 있다. 어떤 유의미한 혁명적 정당도 없고, 비자본주의적이라고 주장이나마 하려고 하는 국가조차 거의 없으며, 혁명 세력으로서의 노동계급의 존재도 전혀 분명하지 않다”(43쪽). 희망을 말하는 것은 당시보다 더 어려워졌지만 희망 없음을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것이야말로 죽음의 기차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오늘, 희망이 더 절실히 필요하다고 홀러웨이는 말한다.
책의 2부 ‘우리는 희망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우리가 배워야 할 희망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는 데 할애되었다. 희망을 배우는 것은 희망을 생각하기를 배우는 것이다(6장). 홀러웨이의 희망은 “전쟁이 없다면 좋을 텐데!”에서처럼 “좋을 텐데”의 소망적 사고와 분명히 다르다. ‘이성적 희망’은 정의된 목표에 도달하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요구하기 때문에, 현존하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싸우는(48쪽) 종류의 희망이다. 그리고 우리가 배워야 할 희망은 정체성주의적이지 않은 희망이다(7장). 그것은 사람을 남성, 원주민, 백인 같은 정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적대의 흐름(및 넘쳐흐름)을 기반으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성일 수도 있고 원주민일 수도 있고 흑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또 홀러웨이는 희망은 부재가 아니라 절규에서 시작되며(8장), 절규는 우리를 부정적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고(9장), 부정적인 사고를 넘어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안에서-대항하고-넘어서”라는 희망의 핵심적인 반정체성주의적 전치사를 채택할 수 있어야 한다(10장)고 쓴다.
화폐가 우리를 죽이고 있다.
우리는 생명의 편에 서거나 아니면 화폐의 편에 서야 한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홀러웨이는 영국 화가이자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지옥의 잠언」에서 인용한 문구 “물통은 가둔다. 분수는 넘쳐흐른다.”를 책의 맨 앞에 제사로 배치했다. 그런데 그 바로 아래에는 홀러웨이의 생각을 표현하는 “화폐는 가둔다. 풍요는 넘쳐흐른다.”가 있다. 물통이 화폐로, 분수는 풍요로 대체되었다. 분노와 희망과 존엄을 말하기 위해서는 ‘화폐’를 타격해야 한다는 것을 홀러웨이는 시작부터 말하고 있다.
돈 또는 화폐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생각은 이런 것이다. 우선 사람들은 더 많이 벌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자본주의 인간”, “자본의 노예” 같은 표현이 널리 쓰인다. 사람들은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돈벌이를 해야 하는 현실을 자조할 때 이런 말을 쓴다. 사람들은 “자본주의”로 인해서 희생되고 질식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희망의 현 상태가 “그런데 뭐 어쩌겠어?”로 끝나듯이, 화폐에 대해서도 “자본주의인데 뭐, 어쩌겠어?”로 끝나고 만다. 화폐 없는 세상 같은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화폐는 자신을 영원하고 죽지 않는 것으로 제시한다. 화폐의 끝없는 자기 확장 운동이 모든 생명의 미래 존재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지만 “화폐를 넘어선다는 생각은 미친 사람들이나 하는 생각이다”(367쪽).
그렇지만 홀러웨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고 쓴다. 화폐의 추구가 지구 온난화와 환경 파괴의 배후에 있다. 개별적이고 대량적인 파괴 무기 생산의 배후에 화폐가 있다. 수많은 삶을 무의미하고 비참한 것으로 만드는 착취의 배후에 화폐가 있다. 이것을 사람들은 분명히 알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자조가 많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빠띠스따들은 “우리는 생명의 편에 서거나 아니면 화폐의 편에 서야 합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존 홀러웨이 인터뷰). 현실이 그러하다면, 화폐의 지배가 지난 수 세기 동안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비참과 파괴와 죽음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멸종 가능성에 직면하도록 하고 있다면, 화폐의 폐지를 해결책 모색의 중심에 두는 방법을 찾아야만 하지 않겠냐고 홀러웨이는 말한다.
풍요는 넘쳐흐른다. 자본은 무리를 두려워한다. 우리가 위기다.
블레이크의 분수를 풍요로 대체한 홀러웨이의 두 번째 문장에서 그는 풍요가 넘쳐흐른다고 말했다.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풍요는 어디에 있을까? 1960년대와 70년대 이탈리아의 ‘오뻬라이스모’가 실현한 “코페르니쿠스적 전도”(107쪽)를 이해하면 홀러웨이의 생각에 접근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전도는 홀러웨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맑스의 자본 비판이 상품이 아니라 풍요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노동하고 생산하는 사람들은 자본의 희생자로 자주 그려져 왔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오히려 자본이 노동계급의 공격에 대응하면서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는 관점이 오뻬라이스모의 코페르니쿠스적 전도였다. 홀러웨이는 이러한 관점에 “주관적 의지주의”의 위험이 있음을 경계하면서도, 책의 여러 곳에서 이들의 주장과 공명하는 문장들을 쓰고 있다.
자본가들과 그 친구들의 문헌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군림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이다. 무리들이 들고 일어나 무질서와 혼돈이 지배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본의 심장 안에 있다. 홀러웨이는 특히 이 책의 7부에서 『파이낸셜 타임스』의 인용구들을 비평하면서 이 점을 보여준다. 2007~2008년 금융위기에 대한 자본의 대응과 코로나 팬데믹으로 초래된 정치경제 위기에 대한 자본의 대응이 어째서 두려움에 기초한 것이었는지를 이 책은 설명한다. 그리하여 부채를 확대하고 양적 완화를 할 수밖에 없고 “가상자본”의 폭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된 것은, 화폐-자본-이윤의 사슬에 무리(rabble)로서의 우리가 갖고 있는 풍요가 결코 완전히 가둬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홀러웨이는 말한다. “화폐의 취약성은 자율적인 체체적 동역학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의 저항과 반란의 힘이 낳는 결과이다”(368쪽).
존 홀러웨이는 누구인가? 사빠띠스따, 제목의 의미, 그리고 홀러웨이의 삼부작
존 홀러웨이는 1947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경력의 초반에는 법률가로서 훈련을 받았고, 1975년에는 에든버러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에든버러 대학에서 오랫동안 정치학을 가르쳤다. 1991년 멕시코로 이주해 사빠띠스따 봉기가 일어나기 직전인 1993년부터 멕시코 베네메리따 뿌에블라 자치대학 인문사회과학 연구소에 재직했다. 사빠띠스따는 NAFTA 협정이 발효되는 1994년 1월 1일 멕시코 라깡도나 정글에서 봉기한 원주민 투쟁이다. 홀러웨이의 사유는 언제나 사빠띠스따와 함께 호흡하는 것이었다. 이 책 『폭풍 다음에 불』에서도 홀러웨이는 사빠띠스따의 아름다운 말들을 곳곳에 인용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이 된 ‘폭풍’의 이미지 역시 사빠띠스따의 또르멘따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이 책의 영어판의 제목은 Hope in Hopeless Times(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이다. 책의 옮긴이이자 홀러웨이 삼부작을 모두 번역한 정치철학자 조정환은 「옮긴이 후기」에서, 『폭풍 다음에 불』 37장과 38장에 등장하는 폭풍과 불의 이미지를 연결하여 책의 제목을 “폭풍 다음에 불”로 바꾸고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을 부제로 배치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홀러웨이는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에 등장하는 진보의 폭풍, 사빠띠스따의 또르멘따(tormenta)에서 폭풍의 이미지를 가져오고 있다. 그것은 위기의 이미지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위기의 희생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위기의 잠재적 주체라고 보면서 폭풍이 불로 이어질 것임을 시사한다. 더 강력한 위기, 불의 위기가 닥친다면 어떻게 할까? 『폭풍 다음에 불』은, 위기가 끝날 때까지 숨어 있는 노아 스타일의 방주로 더 이상 대처할 수 없는 거대한 위기의 필연성과 그 속에 내장된 무리의 잠재력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408쪽)
홀러웨이는 『폭풍 다음에 불』이 자신의 삼부작의 마지막 책이라고 밝힌다. 1권, 2권 모두 갈무리 출판사에서 한국어판이 출간되었고 홀러웨이는 언제나 자신의 신간 소식을 갈무리 출판사에 먼저 알리면서 출간을 제안해 왔었다. 삼부작의 첫 번째 책인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조정환 옮김, 갈무리, 2002)의 경우에는 홀러웨이가 미출간 원고를 미리 보내주어 영어판과 같은 해에 한국어판이 나올 수 있었다. 이 1권의 영어 원제는 Change the World Without Taking Power(권력 장악 없이 세상을 바꾸자, London : Pluto, 2002)로서 “지금까지 좌파가 꿈꾸었던 국가권력 장악은 실제로 꿈에 지나지 않으며 국가권력 장악 없이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획기적인 주장을 했다. 이 책 전반에 걸쳐 절규는 시작일 뿐만 아니라 영속적 에너지로 제시되었다. 삼부작의 두 번째 책인『크랙 캐피털리즘』(조정환 옮김, 갈무리, 2013)에는 1권에서 질문으로 남았던, 혁명의 길과 방법에 대한 제시가 강하게 나타났다. 그 길은 “균열을 통한 틈새혁명”이었다. 이번에 선보이는 삼부작의 마지막 권 『폭풍 다음에 불』에서 홀러웨이는 희망과 풍요, 무리(rabble)를 이야기한다. 절규는 균열을 거쳐 희망으로 이동했다.
홀러웨이는 우리가 긴급한 위기 속에 있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결합하는 다른 방법을 절박하고 시급하게 필요로 한다”(403쪽)는 것을 이제 우리가 알고 있다고 강조한다. 홀러웨이는 사빠띠스따들을 따라,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말하면서-듣기의 운동을 시작하자고, 다른 세상을 향한 춤을 시작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존 홀러웨이 인터뷰
2023년 2월 존 홀러웨이와 존 말킨이 『폭풍 다음에 불』에 관해 진행한 인터뷰이다. 아래에서 원문을 볼 수 있다.
https://www.indybay.org/newsitems/2024/03/23/18864471.php
Q. 이 책에서 선생님은 화폐에 기반을 두지 않는 세계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이지요?
『폭풍 다음에 불』은 당연하면서도 우리 시대에는 거의 말하기가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화폐와 국가, 노동과 빈곤은 사회의 영원한 특징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랍니다. 가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는 있지만 가난은 영구적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화폐에 대해 우리가 하는 생각은 더 많이 갖고 싶다는 것입니다. 화폐의 재분배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화폐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화폐가 우리의 삶과 생각, 잠재력 전체를 형성합니다.
이 책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풍요(richness)입니다. 저는 풍요가 혁명적인 주체라고 주장하는데, 이때 풍요를 금전적 풍요로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다. 잠재력으로서의 풍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언가”로서 풍요를 이해합니다. 우리의 전통, 문화, 희망의 일부인 온갖 종류의 풍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풍요는 항상 화폐의 지배에 의해 왜곡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하는 일, 내일 할 일, 내년에 할 일, 그리고 생이 끝날 때까지 하는 모든 일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살기 위해 돈벌이를 해야 한다는 필요에 의해 좌우되고 형성됩니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 모두는 화폐가 우리 삶에서 실업과 기아를 유발하는 끔찍한 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수년 안에 수십만 명이 굶주림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식량과 우리의 관계가 화폐를 통해 매개되기 때문입니다.
화폐를 어떤 사회적 관계, 즉 우리가 서로 관계를 맺는 지배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면 화폐가 우리의 삶을 왜곡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폐는 우리의 잠재력을 좌절시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불공정하고 폭력적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멸종으로 이끄는 파괴의 동역학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제는 훨씬 더 잘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Q. 탈출구가 있을까요?
탈출구가 있는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구 온난화와 생물 다양성 파괴 등 재앙을 향한 이러한 움직임과 함께 극우 세력이 부상하고 있고 핵전쟁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재앙을 향한 이러한 움직임의 이면에 화폐와 이윤에 대한 추구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맺는 관계들이 화폐를 통해 매개된다는 사실은 개개인에게 매일매일 재앙과도 같은 일입니다. 하지만 인류 전체의 발전 측면에서도 그것은 재앙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우리가 “화폐를 없애 버립시다. 화폐를 폐지합시다. 다른 사회적 관계 형태들을 구축합시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단지 그러면 좋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멸종을 향한 이 드라이브를 피할 유일한 방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Q. 희망과 혁명에 대해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저는 사실 혁명적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성이나 유색인종에 대한 억압이 없는 사회를 희망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사회를 희망합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우리의 투쟁은 항상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으로 끝이 납니다. 때때로 우리는 진전을 이루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이 아닌 화폐가 지배하는 사회의 맥락 안에서 이루어지는 진전이기 때문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혁명이라는 아이디어로 돌아왔습니다. 이 파괴의 사회적 동역학을 어떻게 깨뜨릴 수 있을까요?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의 핵심 주장은 사회적 형태로서의 국가가 자본주의와 너무 밀접하게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를 통해서는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국가는 화폐의 축적을 촉진합니다. 국가는 다른 편입니다. 우리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좌파 사상을 가진 정부가 들어선다 해도 자본 축적을 촉진해야 한다는 제약에 묶여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책 『크랙 캐피털리즘』은 사회 변화를 일으키려면 자본주의 지배에 균열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제출했습니다. “아니요, 우리를 파괴하는 이 시스템에 적응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또는 집합적으로 그 반대 방향으로 걷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더 집합적일수록 더 좋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면 화폐의 힘을 깨부술 수 있을까?”라는 질문입니다. 사빠띠스따 운동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례입니다. 그들은 “아니요, 우리 영토에서는 국가와 자본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민중이 통치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 책 『폭풍 다음에 불』은 “네, 처음 두 권도 괜찮았지만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해요.”라고 말하는 반항적인 손녀-책입니다. 제가 하려는 것은 사회관계로서의 화폐의 약점을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화폐의 힘은 끝없이 계속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의 투쟁이 어떤 방식으로 화폐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이어지는지를 탐구합니다. 이것은 지난 40년 동안 전 세계에서 부채의 엄청난 증가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화폐의 취약성을 확인할 수 있고 화폐의 지배 밖에 있는 공간들을 계속 창출해 나갈 수 있습니다.
Q. 모든 억압 시스템의 중심에는 공포가 있다고 쓰셨습니다. 이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자본이 확장되고 점점 더 외설적으로 되더라도, 자본은 공포를 기반으로 성장합니다. 모든 지배 체제의 중심에는 공포가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소수가 다수를 착취할 수 있는 능력에 의존합니다. 그리고 모든 지배자는 피지배자의 저항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희망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희망, 우리의 풍요에서 생각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화폐는 사실 우리에게 의존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화폐와 자본주의에서의 우리의 역할이 시스템 내에서 취약성을 구성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취약성은 자본주의 체제의 일종의 만성 질환과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 시스템에 균열을 낼 수 있을까?”입니다.
Q. 누가 한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요즘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는 게 더 쉽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 역시 그 표현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지면서 갑자기 그 말이 와 닿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생각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매우 폭력적인 억압 형태로서 수백만 명의 삶을 짓밟았고 지금도 계속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측면은 화폐가 사람들의 활동을 결집시키는 마구(馬具)로서 매우 효과적이라는 점입니다. 화폐는 인간의 노력을 사회화합니다. 5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들을 생산하기 위해 오늘날 창의성에 마구가 채워져 연결되는 것을 보면 화폐가 얼마나 효과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구-채우기는 항상 이윤 추구에 의해 형성됩니다. 마구는 어쩌면 굴레로 더 잘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풍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우리의 잠재력은 금전적 부라는 의미에서 점점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는 시스템 안에 굴레가 씌워져 얽매여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는 시점이 있을 것입니다.
Q. 자본주의 바깥에서 살아가는 사례로서 사빠띠스따에 대해 더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사빠띠스따는 놀라운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 사빠띠스따는 멕시코 남동부 치아빠스에 기반을 둔 원주민 운동입니다. 1983년에 조직을 설립했지만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4년 1월 1일, 멕시코가 북미자유무역협정인 NAFTA에 가입한 날이었습니다. 사빠띠스따들은 산과 마을에서 내려와 치아빠스주의 여섯 개 마을을 점거했습니다. 멕시코 정부는 군사적 대결로 대응했고, 사빠띠스따는 철수했습니다. 그러나 멕시코 국민과 전 세계 사람들의 반응이 뜨거웠고, 12일 만에 휴전이 선언되고 사빠띠스따와 정부 간의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빠띠스따 운동은 그들의 영토 내에서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교육 체계, 의료 체계, 사법 체계 즉 그들만의 통치 체제를 발전시켰습니다.
현재 사빠띠스따가 전하는 메시지는 “삶 그 자체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화폐의 힘에 의해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화폐에 대항하는 삶, 우리는 어느 편에 설지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편에 서거나 아니면 화폐의 편에 서야 합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책에 대한 제 구상이 거기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정말 맞는 말입니다. 정말 영감을 주는 말이죠. 저는 사빠띠스따에 대해 얼마든지 계속 열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들이 공개적 실존을 갖게 된 지 29년째가 다가오고 있습니다[2024년 10월 말 현재는 30년이 넘었다]. 한 세대의 젊은이들이 사빠띠스따 운동 속에서 성장했고, 그들은 자신들만의 다른 사회를 만들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매우 일관되고 강력하며 집합적이고 강인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사빠띠스따는 끊임없이 영감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