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동남아의 위대한 유산은 누가 만들었을까?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한국과 많이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남아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식민 통치와 독립, 근대화와 민주주의 정착이라는 격동의 20세기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1장 ‘동남아시아 역사를 이끈 사람들’에서는 오늘날 동남아의 문화와 정신, 가치관 정립에 큰 영향을 끼친 대표적 인물들을 만나 본다.
태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최초로 입헌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한 나라다. 1932년 ‘인민당’ 혁명은 짜끄리 왕조의 절대 왕정을 종식하고 입헌 군주제와 내각제를 도입했는데, 이 혁명의 주역이 바로 ‘태국 민주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쁘리디 파놈용이다.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자라는 비난과 왕의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1933년, 내무부 장관이던 쁘리디는 특별위원회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는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하에서 구사회의 세력과 전통에 맞서고 앞으로 등장할 새로운 부르주아지와 영원히 싸울 것인가?”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뿐 아니라 어떤 계급의 독재도 싫다.” 위원회는 쁘리디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인정했다.(80쪽)
한평생 군부 독재에 반대했던 쁘리디와 달리, 캄보디아의 폴 포트는 히틀러와 스탈린에 버금가는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이자 학살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급진적인 공산주의 정권인 ‘크메르루주’를 이끌었는데 ‘자급자족적인 농업 중심 유토피아’를 추구하며 극단적인 평등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그가 권력을 장악한 3년 9개월 동안(1975년 4월~1979년 1월) 극악무도한 인권 침해와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고 당시 캄보디아 총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역사는 이 참사를 ‘킬링 필드’라 부르며 폴 포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는 감옥에 가지 않았고 가택 연금 상태로 지내다가 73세에 세상을 떠났다.(44쪽)
베트남의 승려 틱낫한은 시대의 아픔과 함께하며 평화, 화합, 비폭력의 메시지를 설파했다.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면서 베트남 전역과 전 세계를 무대로 붓다의 가르침을 전파했는데, 미국의 흑인 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는 그를 ‘평화와 비폭력의 사도’라 칭했고, 티베트의 영적 스승 달라이 라마는 ‘친구이자 영적 형제’라고 불렀다. 1966년, 틱낫한은 ‘인터빙(Interbeing)’이라는 말을 창안했는데 세상 만물이 서로 의지하며 공존한다는 의미로, 전쟁을 거듭하는 자들을 향한 단호한 꾸짖음이 담겼다.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조국에서 정치적 탄압을 받아 오랫동안 망명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세계인의 화합과 연대를 이끌어 내기 위해 노력한 그의 메시지는 세대와 지역을 넘어 지금의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을 준다.(68쪽)
근대화와 민주화를 위한 치열하고 치밀한 도전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동남아의 독립 국가들은 곧 근대화와 민주주의 정착이라는 과제에 직면했다.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정치적 대립과 갈등, 쿠데타와 독재 같은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다. 2장 ‘근대와 민주주의라는 갈림길’에서는 저마다의 철학과 방법으로 동남아시아의 근대화와 민주화를 위해 활약한 인물들을 다룬다.
1만 80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에는 2억 7500만 명이 300여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1300여 종족으로 나뉘어 산다. 그만큼 다양한 전통과 문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단일한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국가 만들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인도네시아의 국부로 일컬어지는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는 통일된 민족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민족주의, 종교, 공산주의를 통합한 교도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강력한 독재 정치를 펼쳤다. “수카르노의 매력과 권모술수,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가함은 경탄과 분노를 일으켰고, 사람들은 그를 숭배하는 쪽과 적대시하는 쪽으로 갈렸다”는 말처럼 그의 행적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현대사에서 수카르노의 사상은 정치적 흐름이었고, 그의 리더십 자체가 하나의 역사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97쪽)
저널리스트이자 세계적인 작가 목타르 루비스는 이런 수카르노에게 분노하고 적대시하는 쪽이었다. 목타르는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로서 전장 한복판으로 뛰어들었고 전쟁의 참상은 물론 한국인의 아픔과 슬픔을 기록해 세계에 알렸다. 1949년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자 그는 특정 정치 집단에 얽매이지 않는 독립적 언론을 지향하며 신문 《인도네시아 라야》를 창간했고 수카르노의 독재 정치를 비판하며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정부의 탄압을 받아 신문은 폐간되고 목타르는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런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로 선택한 것은 바로 소설이었다. 《자카르타의 황혼》 《호랑이! 호랑이!》 《분노 속의 인간》 등 작품을 통해 인도네시아의 현실을 때로 풍자적으로, 때로 사실적으로 그려 냈다.(158쪽)
인도네시아만큼 복잡한 민족·문화 구성을 가진 싱가포르에서 수카르노와는 다른 방식으로 근대화와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인물이 있다. 싱가포르의 경제와 사회 체제의 기본을 수립한 행정가 고켕스위다. 1965년 8월에 독립한 싱가포르에서는 어떻게 국가 영역을 설정하고 지킬 것인지, 산업별 비중을 어떻게 할지, 공동체 구성원들을 어떻게 ‘국민’으로 탈바꿈시키고 교육하고 일하게 할지, 세금은 어떻게 거두고 어디에 쓸지 등을 정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이때 고켕스위는 재정부·국방부·교육부 장관과 부총리, 중앙은행 책임자를 차례로 역임하며 경제·교육·군사 등 전 분야에 걸쳐 국가 수립의 토대를 만들었다. 경제적 생존, 자주국방, 실용적 교육을 추구한 그의 철학은 싱가포르가 근대화한 것을 넘어 21세기 아시아에서 가장 잘사는 국가, 관광 대국, 금융의 허브, 미중 관계의 조정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초석이 되었다.(129쪽)
독립이라는 목표는 같지만 서로 가는 길이 달랐다
동남아시아는 대항해 시대 이후 풍부한 천연자원과 이권을 노린 서양 열강의 식민 지배를 오랫동안 받았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본의 침략도 받았다. 3장 ‘독립의 꿈, 민족의 청사진을 그리다’에서는 이 시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민족주의와 이데올로기 대립, 혁명과 쿠데타, 냉전과 저항의 역사에 삶을 던진 이들을 소개한다.
1886년, 영국은 버마(미얀마의 옛 이름) 지역을 영국령 인도의 한 주로 편입했다. 미얀마의 독립 영웅 아웅산은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고 무력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조국 독립에 도움이 된다면 사회주의 세력, 소수 종족, 일본, 영국 등 상대를 가리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예를 들어 태평양 전쟁 시기에 영국에 대항하고자 일본과 손을 잡기도 했고, 이후 일본이 배신하자 다시 영국에 손을 내미는 등 실용적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면서 아웅산은 일본을 끌어들인 자신의 과오를 솔직하게 고백했는데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간절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딸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끼(아웅산 수치)는 현재 미얀마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다.(173쪽)
21세기의 첫 독립 국가인 동티모르의 샤나나 구스마오는 아웅산과 조금 다른 경로로 독립이라는 꿈을 향해 나아갔다. 동티모르는 400여 년간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이후 25년간 인도네시아의 무력 통치를 받았다. 1980년 해방군의 사령관이 된 구스마오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인도네시아의 무력 통치와 학살을 전 세계에 고발했다. 수많은 나라가 이에 응답했고, 1997년에는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던 넬슨 만델라가 직접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감금되어 있던 구스마오와의 면담과 석방을 요구하기도 했다. 결국 동티모르는 1999년에 독립해 민주 국가로서 첫걸음을 내디뎠고 구스마오는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2000년에 광주 5·18기념재단이 만든 광주인권상의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초대 대통령으로 5년, 이후 총리로 8년을 보낸 그가 2023년에 77세의 나이로 다시 한번 총리직에 올랐는데, 이런 행보를 두고 권위주의적 통치가 계속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217쪽)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아웅산이 무력, 구스마오가 언론과 정치를 이용했다면 필리핀의 세계적인 작가 호세 리잘은 자신의 소설을 무기로 삼았다. 그는 수백 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 통치를 받으며 축적되어 온 착취와 차별의 구조를 고발함으로써 모순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노력의 결과로 1887년에 《나를 만지지 마라》를 출간했다. 이 작품의 위험성을 직감한 스페인 식민 당국은 금서로 지정하고 호세 리잘을 탄압했지만, 그는 고통받는 필리핀 농노들을 위한 활동을 이어 갔다. 그는 온건하고 평화적인 방식을 선호했지만 급진적 혁명과 무장 봉기의 배후로 여겨져 결국 체포되었고 1896년에 사형을 당했다. 호세 리잘은 필리핀의 국민 영웅, 민족주의 운동의 상징, 아시아 최초의 민족주의자, 첫 번째 필리피노라고 평가받는다. 리잘은 타고르와 같은 해, 쑨원보다 5년, 간디보다 8년 앞서 태어났고, 가장 먼저 민족주의 운동 혐의로 제국에 의해 처형당했기 때문이다. 그의 짧지만 불꽃같은 삶은 동남아시아뿐 아니라 이후 아시아 곳곳에서 일어난 민족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234쪽)
동남아의 어제와 오늘을 통해 우리의 내일을 고민하다
사업가, 화가, 소설가, 기자, 승려, 혁명가, 군인, 의사, 왕족 등 지난 세기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한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한 권의 책에 모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들의 노력과 희생이 주는 울림과 메시지 때문이다. 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혁명가였으며 민중을 사랑한 예술가이자 공동체를 이끈 휴머니스트였다. 한편에는 전쟁 범죄를 저지른 학살자가 있고 권력을 유지하려던 독재자가 있었으며 사후에 평가가 엇갈리는 모순적인 인물도 있다. 이 책이 훌륭한 인품을 지닌 위인들만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필자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품을 지닌 사람, 혹은 불굴의 의지를 지닌 인간의 모범으로서 이들을 주목하자는 거창한 뜻은 없다. (…) 누구에게는 소소한 교훈이 될 수 있고 누구에게는 삶의 지표가 될 수 있다. 타인의 삶이 곧 내 삶이 되지는 않겠지만 위안은 될 수 있다.” -머리말 중에서
오늘날 동남아시아의 많은 나라가 차별과 갈등, 민주주의 탄압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는 현재 한국 사회가 풀어야 할 문제와도 연결된다. 식민지, 독립운동과 혁명, 전쟁과 이념 갈등, 군사 쿠데타와 독재로 이어지는 역사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이웃 나라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그들의 현재를 들여다보아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