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즘을 단순화하는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칸트 철학의 질문들
이 책의 3장 「포스트휴먼 칸트의 단초: 들뢰즈-푸코의 인간 없는 칸트주의」의 저자인 윤영광 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휴머니즘을 단순화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의 통속적 측면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포스트’ 이론들이 누리는 인기의 많은 부분은 극복 대상으로 거론되는 시대와 담론의 복잡성을 충분히 소화하지 않고도 그것 너머로 나아가도록 해주는 듯한 ‘효능감’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통속화된 포스트휴머니즘 담론들은 칸트와 휴머니즘 전통에 대한 단순하고 관습적인 관념에 만족하고 그것을 스스로를 규정하기 위한 부정적 배경으로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휴머니즘과의 외적 대립 관계에 만족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을 단순화하는 대가로 스스로 단순화되는 위험을 피하지 못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근대성의 복합적 유산에 대한 복합적 진단과 평가를 수반할 수밖에 없듯 포스트휴머니즘과 휴머니즘의 관계 역시 외적일 수도, 단선적일 수도 없다.”
그렇다면 포스트휴머니즘은 칸트 철학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 또는 휴머니즘을 중심으로 놓고 볼 때 칸트 철학은 포스트휴머니즘의 동향에 어떻게 응대할 수 있을까? 이러한 주제로 7명의 칸트 연구자들은 아래와 같이 7개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1. 포스트휴먼의 등장을 예견하는 사람들은 왜 인간과 사회변화가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유독 그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보았을까? 이 물음에 대해 어떤 이유를 댈 수 있을까?
2. 자율성, 그것은 정말 인간 고유의 것인가? 대체 자유는 어디서 발원하는가?
3. 칸트는 감성적 직관이 주어지지 않은 가상의 영역과 현실적 삶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
4. 계산주의자들과 연결주의자들은 인공지능 문제를 어떻게 상반되게 다루고 있는가? 비판기 칸트의 사유를 특징짓는 비판철학적 건축술은 계산주의와 연결주의를 어떻게 절충할 수 있을까?
5. 지금 요구되는 새로운 사유혁명은 인간중심주의를 포기하고 생태중심주의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칸트의 도덕적 유토피아와 요나스의 에코토피아를 동일 선상에서 논의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6. 들뢰즈와 푸코의 ‘칸트와 더불어 칸트에 맞서’ 사유하기의 기획이 포스트휴먼적 조건 속에서 칸트를 다시 사유하기, 또 역으로 칸트를 통해 포스트휴먼적 세계를 사유하기라는 과제의 단초가 될 수 있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7. 칸트 철학이 환경과 기후 문제 등 현대의 인류 위기를 초래한 인간중심주의를 강화해왔다는 포스트휴머니즘의 비판은 과연 정당한가?
인간은 왜 신이 되려 하는가?
인간은 왜 인간이 처한 기존 생의 여건에 적당히 만족하지 못하고, 왜 끊임없이 문제를 극복하고, 능력이 닿는 대로 상황을 개선하려 하며, 궁극적으로 현생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는 포스트휴먼, 호모 데우스를 꿈꾸는가? 이성의 본성에 대한 칸트의 분석은 포스트휴머니즘이 열광적으로 호모 데우스를 지향하는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을까? 포스트휴먼의 등장을 예견하는 사람들은 왜 인간과 사회변화가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유독 그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보았을까? 책의 1장에서 「포스트휴머니즘과 인간의 이상」을 쓴 안윤기 저자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검토하고 비판한 ‘이념을 산출하는 이성’을 다루며, 특히 신학의 주제인 ‘신’ 이념, 칸트가 ‘초월적 이상(transzendentales Ideal)’이라고 부르는 것을 도대체 이성이 어떻게 해서 갖게 되는지, 또는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인지의 문제를 칸트의 설명과 함께 살핀다. 이를 통해 인간 이성의 독특한 본성을 칸트와 함께 진단하고 그 특징을 부각시킨다. 인간 이성의 본성에 대한 칸트의 예리한 분석과 통찰을 차용하여 오늘날 도처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에 적용해 보는 글이다.
신비주의와 형이상학은 엄격한 구분이 필요
포스트휴머니즘은 정신과 물질, 인공과 자연, 생명과 기계 등의 전통적이고 이원적인 구분으로 인간의 본성을 규정하지 않으려는 입장이다. 따라서 가상과 현실을 연계하고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서는 무한한 세계를 펼쳐내거나 물질적 현실과 정신적 가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메타버스는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에 태어난 칸트는 흥미롭게도 일찍이 이와 유사한 사태가 형이상학의 영역에서 일어난 것에 주목했고, 이에 그것이 가져올 위험성을 경고한 한편, 그로 인해 펼쳐질 수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 또한 정확하게 진단한 바 있다. 1766년 발표된 『형이상학의 꿈에 의해 해명된 시령자의 꿈』이 바로 그것인데, 여기서 칸트는 스웨덴의 유명한 자연과학자이자 신비주의 사상가였던 스베덴보리의 영계 체험에 대한 자세한 분석과 평가를 내놓는다. 이 책에서 「메타버스, 가상현실, 그리고 칸트의 형이상학 비판」을 쓴 손성우 저자는 칸트의 작업을 통해 현대의 가상-현실 융합 문제를 새롭게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스베덴보리의 『시령자의 꿈』에서 칸트가 해명하고 비판한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를 메타버스 현상에 대입해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모색한다.
인간중심주의와 생태중심주의 사유혁명의 귀결점
「칸트적 인간중심주의와 요나스적 생태중심주의」를 쓴 김양현 저자는 칸트와 생태주의 철학자인 요나스의 문제의식과 내용을 오늘의 문맥에서 음미하고 그 귀결점을 탐색한다. 칸트적 사유혁명은 형이상학의 학문적 정초에 초점을 두고 있는 반면, 요나스적 사유혁명은 기술문명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윤리의 정립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새로운 사유혁명은 한마디로 인간중심주의를 포기하고 생태중심주의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모양새다. 저자에 따르면 문제는 인간중심주의 혹은 인간중심주의적 윤리학의 토대에 대한 이해이다. 인류가 직면한 생태계의 위기 혹은 기후위기를 구체적인 행위와 실천을 통해, 말하자면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통해 인간의 행위를 조절하고 통제하려고 한다면, 인간중심주의는 한편으로는 딛고 넘어야 할 문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제해결을 위한 원리로서 작용한다. 저자는 특히 인간중심주의에서 어떤 부분이 수정되고 포기되어야 하는가? 또 그것의 더는 물러날 수 없는 지점은 어디인가? 등에 대한 차분한 문제의식과 균형 잡힌 시각을 강조한다. 인간중심주의는 한 묶음으로 싸잡아 폐기 처분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현재 직면한 문제 상황에서 문제해결의 원리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와 푸코를 통해 칸트를 다시 사유하기
「포스트휴먼 칸트의 단초: 들뢰즈-푸코의 인간 없는 칸트주의」는 푸코와 들뢰즈의 작업을 통해 포스트휴머니티와 칸트 철학의 복합적 관계를 부각하는 글이다. 들뢰즈와 푸코는 칸트로부터 출발하되 칸트 자신이 설정한 한계 외부로 이어지는 사유의 선(線)을 그려보고자 했던 철학자들이다. 저자는 많은 포스트휴머니즘 문헌들에서 발견되는 칸트의 휴머니즘을 겨냥한 비판에 대한 동조나 반(反)비판보다 오히려 이 대립 구도 자체의 단순성을 문제화하는 것, 즉 칸트의 철학적 인간학 자체에서 인간을 문제화하거나 인간 너머를 가리키는 벡터를 발굴하고 그것을 재료로 전통적 인간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주체론과 능력론을 전개했던 들뢰즈와 푸코의 작업을 통해 저 대립 구도가 포착하지 못하는 포스트휴머니티와 칸트 철학의 복합적 관계를 숙고한다. 즉 들뢰즈와 푸코의 칸트 독해 속에 존재하는 ‘함께-맞서’의 벡터, 칸트와 더불어 칸트에 맞서 사유하기의 기획이 포스트휴먼적 조건 속에서 칸트를 다시 사유하기, 또 역으로 칸트를 통해 포스트휴먼적 세계를 사유하기라는 과제의 단초로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