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살의 신》은 야스미나 레자가 2007년에 출간한 희곡으로 영국과 미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공연 관련 상인 로렌스 올리비에상과 토니상의 최우수 희곡부문을 수상했다.
한 부부의 아들이 공원에서 다른 부부의 아들을 다치게 했다. 한쪽의 아들(브뤼노)이 다른 쪽의 아들(페르디낭)을 패거리에 안 끼워준 게 원인이었다. 소외된 아이가 작정하고 막대기를 휘두른 탓에 다친 아이는 이빨이 두 개나 부러지고 얼굴에도 상처를 입었다. 양쪽 부모는 만나서 관대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부모들의 직업을 간단히 살펴보자면, 페르디낭의 아버지 알랭은 변호사로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못할 만큼 바쁘다. 페르디낭의 어머니 아네트는 자산 관리사로 남편을 대신해 집안의 모든 일을 처리한다. 브뤼노의 아버지 미셸은 철물·도기 관련 용품 도매업에 종사하는 평범한 인물이고, 미셸의 아내 베로니크는 아프리카 다르푸르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
다친 아이의 부모는 손님이 온다고 아침 일찍 튤립 꽃도 사다 놓고 케이크도 만드는 등, 나름 예의를 갖춘다. 하지만 해결책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부모들의 대화는 초반에 두른 관대한 분위기와는 달리 점차 투쟁적으로 변해가고, 폭력에 대한 상반된 견해가 논쟁적 싸움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난다. 급기야 아네트가 불편한 속을 다스리지 못하고 요란하게 토하는 바람에 회의는 난장판이 된다.
사람을 때리는 열한 살짜리 아이
이 작품에서 제목을 언급하는 부분이 한 곳 있는데, ‘대학살의 신’은 “태곳적부터 전적으로 군림해온 유일한 신”이라고 설명된다. 인간의 삶에 폭력이 존재한 오래전부터 우위의 위용을 부려왔다는 신이다. 막대기를 휘둘러 친구를 다치게 한 아이의 아버지인 알랭은 얼마 전에 업무차 콩고에 다녀왔는데 그곳에선 아이들이 여덟 살부터 사람 죽이는 훈련을 받더라며, 아이들이 수백 명을 죽이는 건 일도 아니라고 떠벌린다. “그러니 내 아들이 아스피랑-뒤낭 공원에서 나뭇가지로 친구의 이빨을 하나, 심지어 둘 부러뜨려도 그 사람들은 당신처럼 기겁하고 화내지 않아요”가 아이 아빠의 주장이다.
그러자 다친 아이의 엄마가 “여긴 프랑스라고요. 킨샤사가 아니라! 우린 서구 사회의 관습을 지키며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고요. 아스피랑-뒤낭 공원에서 일어난 일은 서구 사회의 가치와 관계된 문제라고요”라고 응수한다. 이렇듯, 이 작품에서 각 부부는 그들 각자의 정의의 법칙에 따라 아들을 옹호하거나, 반대로 평가절하한다.
예절의 법이 야만의 법을 이길 수 있는가
이 작품을 읽으며 ‘대학살’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의 무게를 굳이 따질 필요는 없을 듯하다. 대신, 대학살의 신은 현재 우리의 삶에서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그 의미를 되새겨보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게 다가온다. 대단한 폭력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그것을 주도하는 인간의 야만성은 과연 어디까지 그 바닥을 드러낼 것인가를 염려하게 되는 세상에서, 예절의 법이 야만의 법을 이길 수 있는가를 여러 면에서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예절의 법을 중시하는 사람들과 야만의 법에 익숙한 사람들, 각자가 따르는 이 두 법칙 중에서 어느 것이 승리할 것인가. 예술과 문화를 중시하며 체면을 잃지 않고자 애쓰던 부모들이 예절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존엄성의 상실 쪽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개선을 향한 가능성도 함께 무너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