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스페인의 젊은 작가가 쓴 극인 ‘스페인 연극’을 리허설하고 있다. 야스미나 레자는 가상의 이 연극을 축으로, 극 중의 배우들을 인터뷰 형식으로 분리하고 극 중의 극인 ‘스페인 연극’의 현장으로 데려가고 또한 그극 중의 극인 ‘불가리아 연극’으로 연결한다. 이러한 삼중 구조가 입체감을 부여하며 배우들의 다채로운 캐릭터와 함께 작품에 흥미를 더한다.
“연출가는 이렇게 말하죠. 그냥 자기 자신이 되면 됩니다.”
이야기는 스페인의 한 가정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남편과 헤어진 뒤 홀로 사는 필라르와 그녀의 새 애인이자 건물 관리인인 홀아비 페르낭, 필라르의 두 딸 누리아와 오렐리아, 그리고 오렐리아의 남편 마리아노가 주인공들이다. 전남편과 헤어져 혼자된 필라르는 예순이 넘은 나이지만 새 남자를 만났고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어 한다. 그녀는 아이들 앞에서 페르낭을 “내 약혼자”라고 부르지만, 그녀의 두 딸은 이러한 엄마를 못마땅해한다. 딸들은 둘 다 배우인데, 동생인 누리아는 데뷔하자마자 곧 큰 성공을 거두고 유명세를 치르기도 한다. 반면 언니인 오렐리아는 동생보다 먼저 배우가 되었음에도 아직 변두리 극장을 전전하는 연극배우다. 누리아는 언니에 대해 은근히 우월감을 느끼고, 동생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오렐리아는 누리아의 사소한 말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오렐리아의 남편 마리아노는 수학 선생이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비극이라고 말하는 염세주의자이고 알코올 중독자로서 매사에 오렐리아와 부딪친다.
가족끼리 애정이라곤 없어 보이는 이들은 다 함께 만나는 것이 일 년에 두어 번뿐인데도 모이면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다. 뻔한 트집으로 상대의 약점을 찌르고, 순간순간 동맹을 찾고, 동맹을 계속 바꾸는 걸 보면 한 편의 코미디같지만, 그래서 오히려 삶의 비극성이 두드러지고, 주인공들은 각자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로 고통스러워한다.
나 자신이란 게 뭔가, 그런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
가족 내에서의 작은 긴장을 탁월하게 그려내는 레자는 이 작품에서 다시 한번, 의사소통의 부재와 고독은 가장 가까운 가족 간에 더 심각해질 수 있음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페르낭은 어느 겨울날 공원에서 필라르에게 멋진 망토와 구두를 사러 가자고 제안하고, 마리아노는 오렐리아에게 안경점에 가서 자신의 안경을 좀 골라 달라고 부탁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특별한 무엇보다도 사소한 일상의 일을 함께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연극과 현실을 오가는 작품 속에서 주인공인 배우들은 캐릭터를 통해 실제의 자기 자신을 찾아간다. 그런 면에서 이 극은 배우들의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다.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그들의 견해, 연출자와 배우의 역할, 그들이 현재 연습하고 있는 ‘스페인 연극’에 대한 이야기 등이 극 중 현실 속에서 배우들의 독백으로 제시된다. 특히 삶에 대한 야스미나 레자의 철학을 대변하는 배우들의 독백이 매우 시적이며 깊은 내공을 드러내는데, 배우로서의 삶과 연극, 그리고 사랑에 대한 성찰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기에 긴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