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술은 평생에 걸쳐 요순시대부터 공자, 맹자에 이르기까지를 연구하고 그 결과물인 ≪고신록≫을 남겼다. 그러나 기존의 통념을 뒤집는 최술의 연구와 주장들이 담긴 ≪고신록≫은 그의 사후 100년 가까이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학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으면서 학술적 가치가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1932년 중국의 ≪사학연보≫에 이 글이 번역, 소개되면서 중국 학계에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고신록≫은 당시에 유행하던 이른바 ‘신사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중요한 저술로 량치차오(梁啓超)·후스(胡適)·첸쉬안퉁(錢玄同)·구제강(顧頡剛) 등의 극찬을 받았다.
그중 그의 최고의 역작으로 꼽힐 만한 작품이 바로 맹자의 여러 행적들을 고증학적 방법으로 분석, 평가하고 있는 이 책 ≪맹자사실록≫이다. 이 책에서 최술은 맹자에 대해 잘못 전해지고 있는 기록들과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을, 허황된 기록이 아닌 경전을 위주로 해서 밝혀내 맹자를 재조명했다. “맹자가 어릴 때에 자신이 여러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절대로 몰랐다고 한다면, 맹자가 어른이 되어서 어떻게 스스로 전국시대의 종횡가(縱橫家) 무리와 다를 수 있었겠는가! 또한 맹자의 어머니는 이미 묘지 옆이 살 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어째서 바로 학교의 옆을 골라서 이사를 가지 않고, 또다시 시장 옆으로 거처를 정했겠는가?”라고 말하며 맹자의 비범함을 부각시키고 ≪열녀전(列女傳)≫에 나오는 ‘맹모삼천지교’의 이야기를 없었던 일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맹자가 양 혜왕을 만나“왕께서는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또한 인(仁)과 의(義)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했다는 얘기를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의심부터 하려 한다고 말하며 맹자에 관한 오해를 풀어 주기도 한다.
≪맹자사실록≫에서 지은이인 최술은 저술 동기를 밝히면서, 공자에게 유학의 도를 이어받아 후세에 전해 준 맹자의 공로가 매우 크다며 맹자를 칭송하고 있다. 이 외에도 책의 서술 전반에 걸쳐 최술이 맹자에 대해 품고 있는 애정이 드러나고 있어, 맹자의 삶을 고증하는 데 얼마나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사실을 철저히 밝히려 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맹자의 생애를 시기별로 나누어 고증하고 ≪맹자≫의 본문을 해체하고 새롭게 분류, 배치하는 등 기존의 고증 방법과는 다른 그만의 독특한 방법론을 보여 주기도 한다. 최술의 학문의 정수이자, 청대 고증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을 만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