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은 고려 왕실에 왕자로 태어났으나 일찍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학구열이 넘친 나머지 왕실과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송나라로 가 불법을 구했다. 송과 일본 등 국외의 여러 종교계 정치계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흩어진 교장을 수집하고 강의하는 데 힘썼고 당시의 여러 종파로 갈라진 불교를 천태종으로 통합하려 했으며 숙종의 개혁 정치와 왕권 강화를 도왔다.
그런 의천의 글을 모은 ≪대각국사 문집≫은 문집 20권과 외집 1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전해지는 판본은 법성사 주지 혜관이 쓴 글씨를 판각한 것으로 해인사 사간판고에 보존되어 있다.
문집은 의천이 쓴 글들을 모은 것으로, 서(序)·사(辭)·표(表)·장(狀)·논(論)·서(書)·소문(疏文)·제문(祭文)·시(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외집은 의천이 송과 요나라 승속으로부터 받은 서한을 모아 놓은 서(書)와 기(記), 시(詩), 비명(碑銘) 등을 모은 것이다. 아쉽게도 현재 남아 있는 해인사 판본은 결락이 많아 내집 20권에 120장, 외집 13권에 20장, 내집의 21, 22, 23권이 빠져 있다.
≪대각국사 문집≫의 편찬과 대각국사비 수립은 당시의 정치·사회적인 상황과 관련이 있다. 1126년 이자겸의 난 이후 묘청 계열이 등장했는데 이 시기는 김부식이 정치적으로 묘청을 비판하는 한편 의천계 화엄종과 교류를 확대한 시기로, 서경 세력의 핵심인 묘청에 대한 견제책의 일환으로 의천계 화엄종을 주목했을 법하다. 문벌 귀족 이자겸과 그의 아들 법상종 현화사 의장을 비롯한 불교계와 결탁한 정치세력을 숙청한 인종은 불교계 재편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고 이에 원명국사 징엄을 비롯한 의천계 화엄종 문도는 그들의 정통성 강조와 정체성 확립을 위해 대각국사비를 건립하고 문집을 편찬하는 일련의 불교계 활동을 전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