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런 말 안 써요”
솔직하게, 생생하게, 섬세하게 포착해 낸 청소년의 모습
이 책에는 예술 고등학교 문예창작과에 다니는 청소년의 일 년 열두 달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며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청소년들이 “기억의 증표”(「5월」)로 삼으려고 스스로 촬영한, 그들만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수능을 대비한 공부를 하거나 취업을 준비하는 청소년들과는 사뭇 다른 이들의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천연덕스럽고 엉뚱하면서도 재치 넘치는 모습에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하고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한다. 가끔은 이유도 없이 마음이 복잡해지고, 공연히 “기분이 좀 그래서”(「지각왕」) 우울한 감정이 찾아오기도 하는 청소년들의 심리를 헤아리면서 시인은 그렇듯 “특수한 사적 경험이 발생하면 바로 시로 옮겨야죠”(「아침이 밝았습니다 고개를 들어 주세요」)라고 말하며 아이들의 내면 안에 도사린 ‘시인의 마음’을 일깨운다.
시를 쓰기 시작한 이유는
숨기고 싶은 게 많아서가 아니라
말을 고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이어서
시를 그만두려는 이유는
말을 고르는 데 지치고 힘들어서가 아니라
숨기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 되어서
- 「자기소개」 전문(152쪽)
그러면서도 시인은 또래들과 조금 다른 꿈을 꾸는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 곁에 있는 평범한 청소년들의 모습을 찾아낸다. 일찍이 진로를 정했지만 자신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친구에게 은근한 시샘을 보내고(「같이 투자」), 부모님의 성적 핀잔에 너스레를 떨며 넘기는(「모의고사」) 이들의 모습에서 등급과 점수에 일희일비하다가도 부모님이나 친구들 앞에서는 짐짓 씩씩한 척 웃으며 처신하는 여느 청소년들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생경한 신조어를 들먹이며 자신들의 모습을 단정 짓는 시선을 향해 “우리/그런 말 안 써요.”라고 또렷하게 이야기할 줄 아는(「우리 그런 말 안 써요」) 보편적인 청소년의 모습이 입체적으로 형상화되었다.
독특한 표현이 주는 색다른 언어적 재미
그리고, 그 무엇보다 먼저 알려 주고픈 시를 짓는 마음
권창섭 시인은 전작 『고양이 게스트하우스 한국어』에서 그랬듯 이 시집에서도 기발하고 개성 강한 언어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발음이 유사한 언어의 연결과 변용, 동일한 어구의 반복과 변주 등 일상의 언어를 다양한 형태로 활용하는 표현법과 치밀하게 짜인 문장들이 단연 돋보인다. 이를테면 “이대 가려면” “이대로만 쭉 가라고”(「진로 상담」), “이해 더하기 오해는 친해”(「이해 더하기 오해는 친해」), “다리 셋, 세 개의 점, 세 사람으로”에서 “다리 Set! 세계의 점, 새 사람으로”(「다시, 3월」), “사유가 부족하다 못해 삼유”(「꿈틀!」) 등에서 보듯 시인은 언어의 폭을 넓혀 새로운 의미를 끌어내는 언어유희의 재미를 한껏 보여 준다.
8, 가만히 두면
눈사람 ☃ 귀여운 듯
8, 옆으로 눕히면
무한대 ∞ 끝없이 이어지도록
8, 가운데 사선을 그으면
백분율 % 하나 둘 셋 줄을 서는
-「8월」 부분(96쪽)
그런가 하면 시인의 시작법과 시 창작론도 엿볼 수도 있다. 물론 일정한 틀이나 규격에 얽매이기보다는 사고가 자유분방한 ‘예비 시인’인 청소년들로서는 “이렇게 쓰면 안 돼/이런 건 시가 아니야”라는 말만 듣다 보면 “예술이 뭔지보다/예술이 아닌 게 뭔지를 알아 가는 게/예술에 대해 알아 가는 지름길일까” 회의가 들기도 하고, “시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무엇이 시가 아닌지만 알다가”(「꿈틀!」) 졸업해 버리는 건 아닌지 불안하다. 그러다가도 시 낭독회에서 친구가 자기 이름을 한 자 한 자 끊어 읽는 순간, “네가 읽은 네 이름은/내가 부르는 네 이름과 다르고/선생님이 부르는 네 이름과도 다르고/칠판에 적혀 있는 네 이름과도” 다르다는 것을 음미하면서 “잠시 이곳이/교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낭.독.회.」)지는 마법 같은 순간을 경험하기도 하면서 “꽁꽁 묶인 말들을 풀고/꽁꽁 언 마음들은 녹여”(「쎄쎄쎄」) 가며 시를 써 나간다.
불편한 낱말은
얼른 지워 버리기
밑줄을 치거나 색을 바꿔
오히려 눈에 띄게 하지 않기
지운 자리는
오래 비워 두지 않기
괄호로 남겨 두지 않기
새로운 낱말로 얼른 채워 넣기
새로운 낱말이 찾아지지 않는대도 절대
울지 말기
일단 한숨 푹 자고 일어나기
기지개를 켜기
(중략)
더 좋은 시로 만들려는 마음이
더 좋은 날로 만들려는 마음과
닿게 하기
더욱더 닿게 하기
-「퇴고 연습」 부분(55쪽)
짐짓 쿨하게 미래로 나아가려는 십 대들이
무사히 성장하길 바라며 보내는 격려와 위로
청소년으로서는 마지막 시기인 고3. “나이를 먹은 것도 안 먹은 것도 아니고”, “고3이 된 것도 안 된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에 놓인 청소년들은 “오래 살진 않았지만/살 만큼 살았어”, “오래 살진 않았지만 알 수 있어/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2월」)라고 짐짓 호기롭게 말하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애써 감추려는 불안한 심리마저 감출 수는 없다. 일률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보단/가르쳐 주지 않는 것들이 더 궁금”하지만 오로지 “학업에 충실해야”(「어른들의 일」) 하고, “들어야 할 말들을 듣다가 너무 많은 말을 들어서” 정작 “내 맘속 말은 하나도”(「한 번 더, 12월」) 못 듣고 만다. “전부 다 잘될 테니 걱정 말라”는 어른들의 빤한 응원과 격려는 오히려 부담만 가중시킬 뿐, 올해가 “내 인생 가장 짧은 한 해가 될 거”(「2월」)라면서 열두 달 중 가장 짧은 2월처럼 ‘인생의 열아홉’도 후딱 왔다 후딱 지나갈 것이라 여긴다.
남의 일을 너무 오래 생각하면
나의 일처럼 느껴지듯이
나의 일을 너무 오래 내팽개치면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데
오래 돌아오지 않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것들에 대해 오래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사월이라 그런 것이라고 선생님은
말해 주었습니다만
어느 달이든 이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린
나의 일과 남의 일이라는 것은 잘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남의 일을 오래 내팽개치지 말자고
나의 일을 오래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 「4월」 전문(52~53쪽)
이 시집은 “교실에 쏟아진 학생들이/교실에 쏟아 내던 말들”을 차곡차곡 주워 담아 “뜨거운 말들은 약간 식히고, 차가운 말들은 약간 덥혀서/날카로운 말들은 보다 무디게, 무딘 말들은 보다 날카롭게 갈고닦아서”(시인의 말) 꾹꾹 눌러 담은 것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내가 있는 교실에선 ‘죽고 싶다’라는 말과 ‘뛰어내리고 싶다’라는 말을 절대 쏟지 말았으면 한다는 부탁이자 명령을 한 적이 있다”라는 시인의 말이 뭉클하다. 막막하고 혼란스럽기만 한 청소년기를 건너가는 이 아이들에게 시인은 “망친 일들을 오래 담아 두는 것은 건강하지 못하다고/상처와 흉터가 꼭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파일명: 2월 29일」) 다정하게 말해 준다. 시인의 바람대로 청소년들이 이 시집을 어딘가에서 ‘주워 가기’를, 그리하여 “오늘 완성되지 못한 시는 내일 다시”(「매일 시 쓰는 사람」) 써 나가기를 응원한다.
담배 한 대 안 피웠다
(스스로를 칭찬함)
술은 몇 모금 마셔 봄
(부모님 허락받고 마심)
연애 세 달 해 봤고
(해 본 거 같지도 않음)
짝사랑도 많이 함
(몇 번은 들켰지만)
친구도 그냥 몇 명
(근데 친구란 것의 기준은 뭐지?)
공부는 그냥 적당히 했다
(잘한 것도 못한 것도 아닌)
시는 제법 많이 썼고
(내가 쓴 것도 시라 부를 수 있다면)
일기는 더 많이 썼다
(찢어 버린 낱장도 많지만)
(중략)
교문 밖을 나선다
(다시 들어올 일 없는)
눈 온다
(그래서 별로 안 춥다)
대학은 가지 않기로 했다
(못 간 거 아니냐 해도 할 말은 없다)
올해는 그냥
열아홉 살 하기로 했다
(스무 살 되는 게 넘 어려워서)
- 「한 번 더, 2월」 부분(156~1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