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 인간만이 활용하는 역량이자 능력의 총체
‘이성’은 서양철학 담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철학은 이성을 중심으로 고수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무엇보다 이성은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구별하는 특별한 요소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로고스를 지닌 생명체zóon lógon échon”라 명명했고, 임마누엘 칸트 또한 인간은 “이성적일 수 있는 동물animal rationabile”, 즉 이성을 부여받은, 또는 이성적 능력을 지닌 존재로 보는 편이 낫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독일철학의 대가인 이 책의 저자 헤르베르트 슈네델바흐는 독일 근대 철학의 전통을 잇는 가운데, 이른바 ‘비판적 이성주의’에 기초하여 언어철학, 사회철학, 인식론, 철학사에 걸친 다양한 철학적 주제를 논구해 왔다. 그는 특히 이성의 역할과 한계 그리고 비판적 사유의 중요성을 밝히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독일 관념론과 실존주의, 비판 이론 등의 전통을 바탕으로 이성과 합리성을 심도 있게 탐구해 왔다. 이성을 인간의 근본적인 능력으로 이해한 그는 “사실 이성은 우리의 항상적 특성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철학자들이 말하듯이 인간만이 활용하는 역량이나 ‘능력’의 총체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동물과 공유한다”(『철학자들이 알고 있는 것Was Philosophen wissen』, 2012)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책 『이성』에서 오늘날 마치 특수한 사유의 층위 또는 정신적 주체인 양 형이상학적으로 들리지만 사실 이성은 “특정한 방식으로 사유하고 행하는 능력인 이성성Vernünftigkeit을 의미할 뿐”이라고 논변한다. 즉, 우리는 이성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윤리적 판단을 내리며 사회적 행위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성’은 어떻게 생성·변화되어 왔나?
또한 이 책은 이성 개념에 대한 이해가 철학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밝힌다. 처음부터 철학사의 중요성을 줄곧 강조해온 슈네델바흐는 철학사와 철학적 용어의 개념사, 특히 이성의 개념사를 이성의 문화사에 근거하여 가능한 한 투명하게 밟히고자 했다. “이성 개념에 있어서 역사적 변화를 가져온 것은 문화 자체의 다양한 변화”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탐구되는 이성의 철학적, 개념사적 이성 구상과 개념의 진화 경로는 매우 광범위한 작업이지만, 저자는 이를 매우 예리하게 포착하여 유려하게 서술한다. 우선 이성 개념이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어떻게 태동되었는지에 관한 설명으로 서두를 장식한다. 이어서 이성이 중세를 거치며 서양철학의 중심 개념으로 떠오르는 과정과 근대 철학에서 베이컨과 데카르트, 칸트와 헤겔을 거치며 새롭게 재구성되는 과정을 기술한다. 20세기 이후의 현대 철학에서는 이성의 탈중심화와 다원화가 이루어졌고, 이성 철학은 이성 개념의 기능화를 통해 합리성 이론으로 이행하여 ‘다수의 합리성’을 낳았다. 이는 이성이 단일한 보편 개념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사회적, 개인적 맥락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음을 뜻한다. 슈네델바흐는 합리성의 다원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통해 공동의 합리적 원칙과 협력의 기초를 마련할 수 있으며 이성의 역할을 재정립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이성이라는 단어는 서양철학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이 모든 이성의 변화와 진화의 역사에 관한 기술은 서론에서 제기된 논제의 증명이 된다. 이성은 이성 비판, 즉 자기비판을 통해 자신의 아포리아를 거듭 극복해 가며 오늘날의 수준에 도달했음이 증명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성 자체를 통한 이성 비판”이며, “이성 개념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이성 개념에 대한 비판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이성이라는 의미를 가진 로고스가 태초에 동일시되던 뮈토스에서 어떻게 분리되었는지, 즉 신학의 시대가 어떻게 철학의 시대로 넘어가고, 종교와 이성이 어떻게 결합하고 분리되는지를 살펴본다. ‘이성’과 관련된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단어 영역들을 세밀하게 살펴봄으로써 서양철학 역사에 이성이라는 단어 영역이 끼친 영향을 탐구하기도 한다.
이 책은 이성의 개념사와 함께 이성에 관한 깊이 있는 철학적 논의를 다루고 있기에 철학적 배경 지식을 미처 갖추지 못한 독자에게는 다소 난해할 수 있다. 슈네델바흐의 논의는 매우 정교하고 체계적이지만 때로는 복잡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이해를 추구하는 독자와 연구자들에게 이 책은 매우 가치 있는 저작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