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사란 무엇인가
역사학에는 사회사, 경제사, 문화사 등등 여러 갈래의 연구 분야가 있다. 그중에서도 관계사는
결이 조금 다르다. ‘관계’라는 단어의 뜻만 보더라도 둘 이상의 주체가 있다는 뜻이고, 그 주체들이 서로 엮이면서 생겨나는 모든 사항이 그 연구 대상이 되는 것이다.
역사학자 배경한은 관계사를 교류, 외교, 이주, 교역, 상호인식을 포함한 ‘관계’를 다루는 사학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곧 개인 대 개인이 아닌, 국가와 국가가 관계를 맺게 되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분야가 더욱 광범위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주장은 저자의 최신작 『20세기한중관계사 연구』에서 잘 설명된다.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 청 제국에서 중화민국이 되면서 일어난 변화
오래전부터 한국과 중국은 긴 인연을 이어 왔다. 사대관계를 외교정책의 기본으로 삼은 중국과의 책봉조공 관계에서 중국은 으레 한국을 상대로 우위를 차지했고 한국 역시 중국을 선진문화국 내지 종주국으로 대접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가 변화될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런 중국의 위치는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 베트남과 몽골 등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산업혁명과 근대화를 겪은 서구열강과 일본이 20세기를 전후하여 제국주의의 기치를 앞세우며 등장하면서 중국과 한국의 관계는 새로운 역사의 국면을 마주하게 된다. 두 차례에 걸친 아편전쟁(1840년, 1856년)에서 패배한 이후 근대화를 위해 여러 차례 시도한 개혁정책 노력에 실패한 청 제국은 청일전쟁(1894년)에서 패배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결국 1911년 신해혁명에 의하여 민국체제로 전환하게 된다. 강화도 조약(1876년)을 계기로 강제로 문호 개방을 하게 된 조선은 1897년 대한제국으로 거듭났지만 1910년에 일본에 합병된다.
이런 가운데 1911년 중국에서 발발한 신해혁명은 열강의 억압을 받고 있던 동아시아 전역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그중에서도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오랜 시간 많은 영향을 받은 한국인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대한제국을 세웠으나 1910년 경술국치를 기점으로 완전히 일본의 식민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한국인들에게 신해혁명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폭압적으로 행동하는 만주족 왕조에 맞서서 자신들의 주권을 부르짖으며 기어이 임시정부를 세운 중국 내 혁명파 세력의 행동력은, 일제에 핍박받는 한국인들에게 감동과 동시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결국 한국 내에서 일제에 반감을 품거나 독립운동을 시도하던 인사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아예 중국 현지, 혹은 중국을 거쳐 해외로 나가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결심한다.
중국으로 간 한인 지사들의 치열한 타향살이
중국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은 독자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현지 중국인의 도움을 받으며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는 편이 일제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무엇보다 외국인이 단독으로 행동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많았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도움은 필수적이었다. 자연히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연대하고, 중국과 한국이 서로를 돕는다는, 이른바 반제연대(反帝連帶)와 중한호조(中韓互助)의 관계가 성립되었다.
광둥 지역과 허난 지역, 상하이와 충칭 등 중국 현지로 건너간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의 양태는 그야말로 다양했다. 신해혁명을 주도하였던 쑨원 등 혁명지사들에게 적극적인 인적, 물적 도움을 요청하거나, 온갖 인맥을 동원하여 한국 내 정세를 해외로 널리 알리려고 노력하는 세력도 있었고, 더 나아가 중국 현지에서 보다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할 인재 양성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한 임시정부 요인도 있었다. 김구의 요청으로 장제스가 황푸군관학교를세워 한국인 학생을 받아 군대를 양성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반대로 중국에 한국이 도움을 준 적도 있었다. 신해혁명을 이끈 쑨원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한인 지사들이 있었는가 하면, 위안스카이의 전횡에 맞서는 토원운동에 직접 참가하는 한국인들도 있었고,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이 국공내전으로 대립한 끝에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기 전까지 장제스의 정치적 의견에 공감하고, 그가 제안한 한중호조 연대를 따르는 임시정부 요인들 또한 많았다. 이 기간 동안 여운형과 쑨원, 김구와 장제스, 신규식과 천치메이 등 한중 인사들이 직접적으로 교류를 주고받은 경우 역시 적지 않다.
손은 맞잡되 다른 꿈을 꾸었으니
이처럼 20세기 초중반에 한국과 중국은 물적으로든 인적으로든 많은 도움을 주고받았다. 다만
우리가 주지해야 하는 것은 따로 있다. 과연 중국은 단순한 동정심이나 과거부터 쌓아 온 의리만으로 조선을 도와준 것일까? 아니면 자신들만의 힘으로 일본이나 미국을 포함한 외세의 입김을 견디기가 힘들어, 힘을 합쳐 고통을 줄이고 의무를 나눠 가질 요량으로 먼저 손을 내민 것일까?
저자의 시각으로 보면 20세기 초중반 동안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단순한 의리로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이 존재하고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그 외의 숱한 국지전이 빈발하는 각박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동질감 위에 진심 어린 우정을 나누는 인사들도 있었으나 각자의 목표는 달랐다. 의도가 나쁘거나 사이가 안 좋아서라기보다는 동아시아의 질서를 재편하고자 열강들이 속속들이 끼어드는 시기에 서로의 입장이 달랐고, 그러다 보니 같은 꿈을 꾸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즉, 손은 맞잡았어도 머릿속에는 완전히 다른 생각과 목표가 있었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조바심으로 상대에게 제한적인 조건을 내거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이 상태는 한국이 광복을 맞이하고 중국 내에서 국공내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어진다.
1903년부터 1949년까지, 한국과 중국이 맺어 온 ‘관계’의 역사
저자가 중화권 각지의 도서관과 공문서 보관소를 섭렵하며 모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엮어낸 이 연구서는 재중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대중(對中)교류와 호법정부나 북양정부, 국민정부 등 중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비롯한 한인독립운동 세력에 대하여 가졌던 인식이나 태도, 정책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아울러 국내의 잘 알려진 독립운동 인사들 외에도 일제강점기 초기 중국으로 건너가 조국의 광복을 위해 활발히 움직였던 김규흥과 김병만 등 다소 생소한 한인 독립지사들의 행적까지, 우리가 여태까지 알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본다.
세계화라는 말이 종종 등장하는 지금의 시대에 관계의 우위를 논하는 건 그다지 효용성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세계를 구성하는 나라 간의 관계가 어떻게 진척되어왔는지, 나아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 또한 그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