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의 시대를 연 ‘견생’ 이야기 - 장난꾸러기 아이, 말하는 개, 말풍선
리처드 펠튼 아웃코트가 쓰고 그린 《타이그 - 어느 말하는 개의 회고록》이 ‘젤리클래식’ 두 번째 책으로 출간됐다. ‘말랑말랑 반짝반짝 젤리클래식’은 젤리클이 기획한 새로운 고전 시리즈다.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세대에 맞는 새로운 번역이 필요하다는 말은 언제나 옳다. ‘젤리클래식’은 낡은 고전을 골라 말랑하게 옮기고 숨은 고전을 찾아 반짝거리게 내놓으려 한다.
만화에서 흔히 쓰이는 말풍선을 처음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만화 역사가 빌 블랙비어드는 리처드 펠튼 아웃코트가 그린 《옐로 키드(Yellow Kid)》를 ‘만화 형태를 갖춘 역사상 최초의 만화’라고 했다. 아웃코트는 만화라는 매체를 대중문화의 중요 요소로 만들고, 대중적인 만화 형식을 완성하고, 작품 속에 풍자와 유머까지 담았다. 아웃코트는 《옐로 키드》에 이어 ‘최초의 말하는 개’ 타이그가 주인공으로 등장해 반려견으로 지낸 ‘견생’을 회고하는 만화이자 그림책인 《타이그》를 출간해 더 큰 인기를 얻었다. 《타이그》는 아웃코트가 낸 여러 책 중에서 처음 한국어로 번역됐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펼쳐지는 반려견과 소년의 우정과 모험
미국 만화는 신문 산업하고 함께 발전했다. 신문 한쪽에 네 컷 안팎으로 실리던 만화는 1면에 등장할 정도로 신문 판매를 이끄는 흥행 요소였다. 특히 《옐로 키드》는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옐로저널리즘’이라는 말까지 만들 정도로 신드롬을 일으켰다. 1902년 《뉴욕 헤럴드》에 연재한 《타이그》는 더 큰 인기를 끌었다. 그렇지만 아웃코트는 신문 연재만화를 그대로 묶어 출간하는 데 손쉬운 선택을 하지 않고 전혀 새로운 형태를 띤 작품을 시도해서 또다시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바로 이 책 《타이그》다.
《타이그》는 사람보다 짧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불도그 타이그가 중년에 접어들어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만화 형태를 띤 그림책이다. 마무리도 타이그가 남기는 유언장인 만큼 완벽한 형태를 갖춘 회고록이다. 장난꾸러기 부잣집 도련님 버스터 브라운과 반려견 타이그, 버스터의 여자 친구 메리 제인 등이 등장한다. 새로운 형식을 내세운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등장인물들도 인기를 얻어 캐릭터 이름을 딴 아동복이 불티나게 팔리기도 했다. 그중 메리 제인 구두는 오드리 헵번, 가브리엘 샤넬이 즐겨 신으며 구두 디자인의 대명사가 될 정도다.
20세기 초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 만화 같은 이야기는 도시와 자연, 인간과 동물 사이를 오가며 흥미롭게 펼쳐진다. 대도시 뉴욕에서 태어난 버스터 브라운은 어른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기상천외한 일들을 벌여야 직성이 풀리는 타고난 장난꾸러기다. 그때 뉴욕에 오늘날 한국처럼 노키즈 존이 없어서 다행이지 어디든 나타만 나면 당장 쫓겨날 정도로 유명짜한 사고뭉치다. 말하는 반려견 타이그는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뉴욕 아파트는 남자아이나 개를 기르는 데 전혀 알맞지 않아요.”
버스터 브라운하고 다르게 타이그는 시골 농장 출신 반려견이다. 엄마를 따라 시골에서 집을 지키며 살던 개 타이그에게 아기 버스터 브라운이 찾아오고 둘이 함께 뉴욕으로 떠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뉴욕의 삶을 낯설어하던 타이그는 드디어 말썽꾸러기 버스터와 함께 농장으로 이사한다. 농장에서 지내며 칠면조, 말, 거위, 돼지, 거북 등 여러 동물들하고 갖가지 흥미로운 일들을 겪는다. 그러다 버스터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타이그도 도시에 사는 반려견이 된다. 시골을 떠난 도시에 돌아온 버스터는 여전히 갖가지 사고들을 치고 또 반성하고 뉘우친다. 타이그의 따뜻한 시선 속에서 버스터도 점점 성장해 나간다.
반려견의 눈으로 바라본 사람, 사회, 그리고 동물권
어린 시절에는 버스터를 친구처럼 대하던 타이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때로는 아들처럼 아낌없이 사랑을 베푼다. 나이 드는 속도가 다른 두 친구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하고 삶과 죽음을 함께한다. 타이그는 그야말로 반려견으로서 온전하게 자기 삶을 바친다. 더불어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깊고 넓어진다. 그러고 보면 말하는 개라는 설정은 사람과 반려견 사이의 친밀함과 공감, 애착을 표현하는 데 아주 알맞은 장치다. 타이그는 때때로 엄마나 아빠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말썽만 부리는 버스터를 무한한 사랑으로 이해하고 보듬는 존재다. 지금 내 곁에 자리하고 있는 어떤 반려동물들처럼 말이다.
타이그에 따르면 버스터와 타이그는 동물 보호 활동을 펼치는 동물학대방지협회와 오듀본협회 회원이다.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 속 좁은 아파트에서 함께 살아가는 가족 같은 반려동물이 한층 늘어난 요즘, 타이그가 들려주는 만화 같은 견생 이야기는 동물권이 지닌 의미를 되새겨보는 계기도 된다. 1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 곁에 자리한 반려동물은 나도 똑같이 생각하고 사랑하고 나이 드는 소중한 존재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타이그가 들려주는 견생 이야기를 함께 들어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