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분화된 아니무스animus
유창근(문학평론가. 문학박사)
문학작품을 논할 때, 그 작가의 생애를 조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영국의 대표적 시인 밀턴John Milton이 쓴 「실명失明에 관하여On His Blindness」는 그의 눈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44세(1608) 때 창작되었다는 사실을 알 때, 작품을 훨씬 더 폭넓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 김인녀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인연의 열매』를 관심 있게 읽었다.
김인녀 시인은 평안남도 덕천에서 3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유년시절에는 대지주의 딸로 부유한 환경 속에서 자랐으나, 1948년 국토가 남과 북으로 분단되자 북한이 사회주의 노선을 택하면서 그의 가족들은 사유재산을 몰수당하고, 봉산 탄광촌으로 쫓겨나 근근이 끼니를 이어오다가 1·4후퇴 때 월남越南하여 전라북도 이리(현재 익산)에 정착했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부모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녀들을 모두 학교에 보냈는데, 김시인은 이리여자중·고등학교를 거쳐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교)을 졸업한 뒤 모교의 영어영문학과 조교수, 체신부 공무원, 미국계 회사 임원, 독일계 회사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특히 독일계 회사에서는 그에게 조건 없이 CEO 자리를 맡길 정도로 업무능력이 뛰어났고 통솔력이 강했다고 한다.
평소 시詩에 관심이 많았던 김시인이 시창작詩創作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76세 때 남편과 사별하면서부터다. 처음 3년 동안은 혼자서 습작생활을 하다가 시 창작반에 들어가 2년간 체계적으로 시 공부를 하고, 2017년 「현대시선」 가을호 신인문학상 시 부문에 「석양의 단상」, 「설악산의 가을」, 「허무」가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등단 다음 해인 2018년에 제1시집 『나의 황금날개』(2018.3) 출간을 시점으로, 제2시집 『나목의 노래』(2019.3), 제3시집 『꽃잎 사랑』(2020,3), 제4시집 『꽃바람』(2021.7), 제5시집 『흐르는 강물처럼』(2022.5), 제6시집 『그대는 나의 봄』(2023.7) 등 해마다 1권씩의 시집을 발간하여 왕성한 창작 의욕을 보여왔다. 그리고 등단 7년 차인 금년에 일곱 번째 시집 『인연의 열매』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그가 등단 당시에 ‘매년 한 권씩의 시집을 내겠다’는 약속을 지금까지 한 번도 어기지 않았고, 시집 출판도 첫 시집을 발간한 출판사에 계속 맡겨온 것은 그의 올곧은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김시인은 등단 이후 한국문인협회회원, 한국문인협회 구로지회회원, 현대시선문인협회 부회장, 아차산문학상 추진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문인으로서의 위치를 탄탄히 다져왔다. 그동안의 열정적인 창작 의욕과 문학적 성과를 높이 평가받아 난설헌 허초회문학회 금상, 제5회 시선문학 대상, 제5회 창작동네 문학상, 제7회 시동네 문학상, 송강문학상 대상, 농민문학작가 대상을 받은 바 있다.
□ 김인녀 시인의 제7시집 『인연의 열매』(2024)에 수록된 작품들은 기존의 시집에서 보여준 인간人間과 인간人間, 인간人間과 자연自然, 자연自然과 자연自然의 연결고리를 더욱 구체적으로 형상화했는데, 특히 이번 시집에서 ‘꽃’과 ‘그대’와 ‘그리움’이라는 시적 대상물을 역동적이면서도 진취적인 이미지와 연결하여 긍정적으로 분화시키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김인녀 시인은 한마디로 ‘꽃의 시인’이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수없이 많은 ‘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꽃’들은 김시인이 걸어온 인생 여정旅程을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며, 역동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제자 융 C.G.Jung은 인간의 심리 본질을 영혼과 의식과 무의식을 포함한 포괄적인 개념으로 파악했는데, 인간 개개인의 심리 속에 공통적으로 작용하는 원형 가운데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를 언급하였다. 여기서 아니마는 남성의 내면에 존재하는 여성적인 요소를, 아니무스는 여성의 내면에 존재하는 남성적인 요소를 일컫는데, 아무리 남성다운 남성일지라도 그의 내면에는 여성적인 요소가 들어있고. 아무리 여성다운 여성일지라도 그의 내면에는 남성적인 요소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순수한 남성과 순수한 여성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 양성 속에는 각각 서로 다른 성이 들어있어서, 특히 여성의 경우, 건강한 아니무스의 발달을 통해 힘의 충동에서 진취적인 성향과 말의 의미적 힘을 깨닫고, 그 의미를 실현하고, 지혜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김인녀 시인의 시에서 특히 아니무스적 성향의 시어나 정황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의 시집 『인연의 열매』에 사용된 시어를 분석한 결과, 시집에 수록된 총 105편의 작품 가운데 41%에 해당하는 43편이 ‘꽃’을 소재로 선택하고 있다. 특히 시집의 제1부에 수록된 25편의 작품은 전체가 꽃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25편 가운데 「그대 사랑」과 「난꽃이 지네」등 2편을 제외한 나머지 23편은 ‘피는 꽃’을 노래하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상승적上昇的 이미지를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상승적 이미지는 그밖에 「그리움」에서 ‘꽃이 활짝 핍니다/많은 고운 생각이 꽃처럼 핍니다/당신의 안부인가 가슴 설렙니다’, 「붉은 꽃으로 오는 당신」에서 ‘향기로운 꽃향기 타고 당신이/날아와 삭막하던 내 뜰에/따사로운 봄 꽃을 펼치고/내 가슴에 붉은 사랑꽃이 피었네’, 「나의 바다」에서 ‘간밤에 비바람 지나니 동녘에/오색 무지개 희망의 꽃등 달고/파도는 영광의 찬미를 노래하고/바다는 사랑의 윤슬이 일렁인다’ 등 여러 작품에서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다.
현대백화점 입구에 얼마 전
꽃집이 문을 열어 가지가지
꽃이 활짝 웃으며 반긴다
아침이면 새꽃들 향기 물씬 안고
꽃집 아가씨는 꽃보다 더 곱게
이꽃 저꽃 꽃이야기를 묶는다
시들은 꽃은 슬며시 빠지고
새로운 이야기는 매일 다른 꽃으로
시작해야 하는 꽃집이다
그 많은 꽃 중에 항상 있는
시들지 않는 꽃 속에 웃음꽃 피우는 꽃
활달한 꽃집 아가씨꽃이다
「시들지 않는 꽃」 전문
앞의 시 「시들지 않는 꽃」은 형식적인 면에서 4연 12행의 기승전결起承轉結 형식을 갖춘 정형시다. 관심 있게 살펴보면, 전체 12행 중 11행에서 ‘꽃’을 시어로 선택하고 있는데. 다만 둘째 행 ‘현대백화점 입구에 얼마 전’이라고 서술한 단 한 행에서만 ‘꽃’을 시어로 선택하지 않았다. 그런데, 2연의 3행에서 ‘이꽃 저꽃 꽃 이야기를 묶는다’. 4연의 2행에서 ‘시들지 않는 꽃 속에 웃음꽃 피우는 꽃’이라고 서술하는 등, 한 행 속에서 ‘꽃’이라는 시어를 무려 3회씩 반복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곧 ‘시들지 않고, 활력이 넘치는 꽃’을 시각적으로 희화화戲畫化하기 위한 의도로 분석된다.
또한, 「시들지 않는 꽃」 전반부에서 김인녀 시인은 꽃의 속성인 ‘시듦’을 체험적 사실에 비추어 진술하고 있는데, 마지막 결론 부분에 꽃집 아가씨를 ‘시들지 않고’, ‘웃음꽃을 피우고’, ‘활달한 꽃’으로 비유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유는 솔직히 논리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모순적矛盾的 진술이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항상 웃음꽃을 피우고, 활달한 모습을 보여주는 꽃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시들지 않는 꽃」에서 모순적인 논리를 거침없이 쏟아내는 행위는 남성 특유의 오기傲氣로 이른바 여성의 내면에 존재하는 남성성, 즉 아니무스animus로 해석할 수 있다.
시에서의 언어는 서로 모순되거나 충돌하는 것끼리 하나의 문맥 안에 수용할 때 의외로 신선하고 훌륭한 시가 빚어질 수 있다고 한다. 정서적 언어상으로 볼 때, 설령 지시대상指示對象의 오류가 크다고 하더라도, 태도나 정서면情緖面에서 일으킬 수 있는 효과가 더 크다고 판단될 때는 서로 모순되거나 충돌하는 언어를 한 문맥 안에 수용하는 것이 크게 문제 되지는 않는다.
꽃은 피었습니다
인생도 그러하거늘
하늘의 먹구름이 몰려와도
폭풍이 가로수를 후려쳐도
눈보라가 맨살을 할퀴어도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도
눈물 젖은 가슴이 희망의 패기로
봄은 다시 오리니 참아야 한다고
꽃은 말합니다
꿈의 정상은 눈부실거라고
「꽃은 말합니다」 2연
앞의 시 「꽃은 말합니다」는 꽃에게 인격을 부여하고, 비유적으로 교훈적 메시지를 전하는 일종의 알레고리allegory시로 볼 수 있다. 알레고레 시는 특히 독자의 반성이나 성찰을 촉구하려는 목적을 지니기 때문에 지적知的인 성격이 강하다. 이 시에서 화자는 꽃을 의인화하여 추상적인 개념이나 현실의 모습을 인생에 비유하고 있는데, 시의 화두를 ‘꽃은 피었습니다’로 시작하여 먹구름이 몰려오고, 폭풍이 몰아치고, 눈보라가 맨살을 할퀴고,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도 역경을 잘 견뎌야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교훈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여기서 ‘먹구름’, ‘폭풍’, ‘눈보라’, ‘갈증’, ‘배고픔’ 등은 언어 그 자체에 남성성을 지니고 있어서 시인의 정신세계에 잠재한 아니무스animus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꽃은 말합니다」에서 ‘꽃’은 마치 세상을 오래 살아온 인생의 대선배가 새내기들에게 ‘온갖 고초를 잘 견뎌야 좋은 결과를 얻는다’며, 마지막을 ‘꿈의 정상은 눈부실 거라’고 마무리하여 주제가 선명하고, 시의 제목을 동사형으로 처리한 부분도 생동감이 있다.
잊은 듯 잊혀지지 않는 그대 생각
아픔을 미소로 색칠한다
무심한 순간 속에 눈물을
뜨겁게 삼키며 두레박질을 한다
길어 올린 차가운 고독으로
고통이 아플수록 강한 채찍이다
차곡차곡 쌓은 고뇌로 벙그는
꿈의 꽃은 화사하고 눈부시다
뭉게구름 푸른 하늘 잊은 채
먼 고개 무심히 넘고 넘어가도
변함이 없는 꽃
꿈의 꽃이다
「꿈의 꽃」 전문
시인은 「꿈의 꽃」을 화사하고, 눈부시며, 어떤 상황에서도 시들지 않고, 변하지 않는 ‘영원불멸의 꽃’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여기서 화자가 말하는 ‘꿈의 꽃’은 단순히 식물로서의 꽃이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인 동시에 ‘순결함’이고, ‘새로움’을 의미하는 관념적인 상징물이다. 특히 이 시의 화자가 ‘길어 올린 차가운 고독으로/고통이 아플수록 강한 채찍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차가운 고독’이나 ‘강한 채찍’ 또한, 언어 자체에 남성성이 강하게 내재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 시집 『인연의 열매』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시어는 ‘그대’라는 대명사다. 사전적 의미로 볼 때, 말하는 사람이 친구나 아랫사람을 높여 부를 때 사용하는 2인칭 대명사가 ‘그대’다. 주로 ‘~하오’체와 ‘~해라’체에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오’체와 ‘~해라’체가 사어死語가 되면서 특히 현대시에서는 사용 빈도가 점차 낮아지고 있다. 김인녀 시인의 이번 시집을 분석해보면, ‘그대’라는 시어가 약 60여 회 선택되고 있어 ‘꽃’ 다음으로 사용 빈도가 매우 높은 편이다.
① 메마른 가슴에 불꽃이 입니다
그대 눈빛에 내 가슴이 탑니다
연기도 없이 탑니다
재도 없이 타오릅니다
그대는 시시때때 이글거립니다
내 모두를 태우는 불덩입니다
태양보다 뜨거운 불꽃 그대
날 사르는 활활 타는 불꽃입니다
「그대는 불꽃」 전문
② 무료한 봄날에 그대가
꺾어 준 꽃은 그저 꽃이 아니라
그대의 붉은 관심이었습니다
찌는 듯 태양이 쏟아질 때
펼쳐 준 양산은 빛가리개가 아니고
그대의 뜨거운 열정이었습니다
땀을 식혀 주는 그대 그림자는
그냥 그림자가 아니라 사랑을
말해 주는 그대 몸짓이었습니다
한겨울 꽁꽁 언 내 손을 잡아 준 것은
그대 손이 아니라 그대 심장에서
분출하는 뜨거운 사랑이었습니다
「그대 사랑」 전문
김인녀 시인은 시① 「그대는 불꽃」에서 불의 이미지와 꽃의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접맥하고 있다. 그대는 곧 ‘내 모두를 태우는 불덩이’이며, ‘날 사르는 불꽃’이라 비유하고 있는데, 이 시에서, 연기도 없고 재도 없이 모두를 다 태워버리는 불꽃은 아니무스animus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불은 그 속성으로 보아 빛과 열을 수반한다. 「그대는 불꽃」에서 화자는 ‘그대’를 ‘태양보다 뜨거운 불꽃’, ‘활활 타는 불꽃’에 비유한 뒤, ‘그대의 눈빛에 내 가슴이 탄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대’의 존재를 어느 것에도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존재’, 신神과 같이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불꽃’이나 ‘불덩이’는 김인녀 시인의 내면에 잠재된 대표적인 아니무스animus로 읽을 수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에 의하면, ‘불꽃은 곧 씨앗이며 씨앗은 곧 불꽃’이라고 했다. 불은 이중적인 것으로 그 정령은 불같은 것이며, 빛나는 것이며, 다시 뜨겁게 하는 것이며, 태양의 불과 다르게 화산의 불은 폭력적이며 밖으로 터져나가는,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불은 또 성性을 상징하는데, 그 생태학적 충동적 행위나 성적 에너지 외에, 따뜻하게 해주고 빛을 주는 것만으로도 남녀간의 정신과 사랑의 원형적 이미지를 상징한다.
앞의 시① 「그대는 불꽃」에서 ‘그대’를 불꽃이나, 불덩이 등 구체적 사물에 비유하고, 시② 「그대 사랑」에서는 ‘그대’를 붉은 관심, 뜨거운 열정, 사랑을 말해주는 몸짓 등 관념적 세계에 비유한 점도 재미있다. 특히 이 시에서 김인녀 시인은 ‘A=B’ 형식의 은유를 통해 서로 다른 사물이나 관념을 결합하고 있는데, ‘꽃=붉은 관심’, ‘양산=뜨거운 열정’, ‘그림자=사랑을 전해주는 몸짓’, ‘그대 손=뜨거운 사랑’ 등 사물과 관념의 조합이 신선하다. 그리고, 시②의 1연에서 봄의 대표적 상징물인 ‘꽃’을 발견할 수 있는데, 화자는 ‘무료한 봄날에 그대가/꺾어 준 꽃은 그저 꽃이 아니라/그대의 붉은 관심이었습니다’라며, 그대가 꺾어준 꽃은 단순히 봄에 피는 ‘꽃’이 아니라, ‘그대의 붉은 관심’이라고 관념적 세계와 접맥시킨 점, 그리고 2연에서 찌는 듯한 ‘태양’, ‘양산’, ‘열정’ 등의 시어와 접맥하여 무더운 여름 이미지를, 3연에서 ‘땀을 식혀주는 그대 그림자’와 접맥하여 선선한 가을 이미지를, 그리고 4연에서 ‘한겨울 꽁꽁 언 내 손’과 접맥하여 겨울 이미지를 도출한 점이 매끄럽다.
그물 같은 인연의 끈이 세상을
촘촘히 엮어 벽돌 쌓아올리며
넓고 높은 성벽을 이루듯
그대와 사막 같은 뜰에 심은
모래알 같은 인연의 씨앗을
많은 인내와 애정으로 북돋아 주었네
때로는 원치 않는 잡초들이
바다 어귀를 덮어 힘들고
심히 몰아치는 풍랑에 멀미도 했지만
아롱다롱 꽃봉오리 웃음소리에
향기롭고 달콤한 결실이 영원한
사랑되어 인연의 열매가 익는다
「인연의 열매」 전문
「인연의 열매」는 이번 시집의 표제가 된 작품이다. 형식적인 면에서 4개의 연이 각각 3행씩으로 구성되었으며, 규칙적인 리듬과 기승전결起承轉結의 형태를 갖춘 정형시다. 화자는 2연에서 ‘그대와 사막 같은 뜰에 심은’/‘모래알 같은 인연의 씨앗’을/‘많은 인내와 애정으로 북돋아 주었네’라며, 그대와의 인연을 ‘사막 같은 뜰에 심은 모래알 같은 인연’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꽃봉오리의 웃음소리’, ‘향기롭고 달콤한 결실’, ‘인연의 열매가 익는다’는 등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정황들과 접맥하면서 상황이 밝고 활기찬 분위기로 반전反轉된다, 특히 2연에서 그대와 맺은 인연을 ‘인연의 씨앗’으로 비유하고 있는데, 원치 않는 잡초들이 바다 어귀를 덮고, 심하게 몰아치는 풍랑에 멀미하고, 온갖 역경을 견디고 마침내 향기롭고 달콤한 사랑 속에서 ‘인연의 열매’로 익어가는 과정이 드라마틱하다. 아울러 이 시에서 ‘사막’, ‘모래알’, ‘잡초’, ‘풍랑’ 등의 시어를 볼 수 있는데, 언어 자체가 메마르고, 거칠고, 삭막하여 남성성男性性이 강한 아니무스animus로 분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번 시집에서 ‘그대’라는 2인칭 대명사 외에 「붉은 꽃으로 오는 당신」, 「임의 음성인가」를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당신’과 ‘임’이라는 인칭 대명사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들은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간절히 사모하는 ‘그리움’의 분신으로 읽을 수 있다.
비가 온 후 가을 햇살은
찬란하게
아름답게
그리움처럼 폭포를 이룬다
황금빛 햇살 사이로
가을을 재촉하는
투명 날갯짓
바람 사르르 잠자리처럼 난다
한 잎 두 잎 떨어진
낙엽이
바삭바삭
뒤척이는 소리 가슴 설렌다
아
임의 음성인가
보고 싶은
그리운 임이여
「임의 음성인가」전문
이 시의 화자는 낙엽 지는 소리에서 사랑하는 임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임이 존재하는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향해 무한한 상상력을 펼친다. 특히 이 시에서 임의 음성은 임을 향한 그리움으로 연결되는데, 그 그리움은 3연의 ‘한잎 두잎 떨어진/낙엽이/바삭 바삭/뒤척이는 소리 가슴 설렌다’에 함축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바람이 불어 옵니다
창문을 두드립니다
당신인가 귀가 쫑긋 기웁니다
비가 옵니다
유리창 위를 방울방울 흐릅니다
당신의 눈물인가 눈이 번쩍 뜨입니다
꽃이 활짝 핍니다
많은 고운 생각이 꽃처럼 핍니다
당신의 안부인가 가슴 설렙니다
바람 불고 비가 오고 꽃이 펴도
모두 당신을 향한 그리움입니다
「그리움」 전문
이 시의 화자는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꽃이 피는 것 모두 ‘당신’을 향한 그리움으로 연결한다. 특히 1연에서 ‘바람이 불어옵니다/창문을 두드립니다/당신인가 귀가 쫑긋 기웁니다’라며 청각적 이미지와 접맥하고, 2연에서 ‘유리창 위에 흐르는 빗방울을 당신의 눈물’이라고 시각적 이미지와 접맥하여 그리움을 극대화한 점이 돋보인다.
그리고, 이 시의 결말을 바람 불고, 비가 오고, 꽃이 펴도 그것은 ‘모두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라고 함축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 ‘모든 사람은 그의 내면에 자기 자신의 이브를 가지고 있다’는 독일 속담이 있다. 서두에서 살펴본 것처럼, 김인녀 시인은 평안남도 덕천에서 태어나 1.4후퇴 때 부모를 따라 월남하여 전북 익산에 정착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학업에 매진하여 교육자, 공무원, 회사 CEO등 진취적이며 능동적인 지도자의 길을 걸어왔다.
평소 시창작에 관심을 가져오다가 2017년에 늦깎이 시인으로 등단하여 지금까지 매년 1권씩의 시집을 발간하는 등 왕성한 창작의욕을 보였다. 융G.C.Jung은 이처럼 여성의 내면에 있는 진취적이고,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성향을 아니무스animus로 설명했다. 아니무스의 원형은 여성의 정신에 있어서 남성적인 측면으로 삶의 언어, 현실적 존재, 역동성, 낮, 염려, 아침, 계획, 사고, 동물, 엄격한 힘의 보관자, 능동, 지知, 분열, 합리적이고 추상적 사고 등의 양상을 지닌다. 특히 잘 분화된 아니무스animus는 여성으로 하여금 진취적인 정신, 용기, 진실성, 그리고 합리적인 성격으로 유도하여 사고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김인녀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아니무스animus를 대표할 수 있는 작품으로 「내 친구」가 있다.
너는 정말 열심히 살았지
삶의 일선에서 전투하듯이
눈빛 속에 말 속에
몸짓이 속살거리네
어려운 일이 닥쳐도
꿋꿋했지 유머로 재치로
진한 농담으로 감정이 굳은
우리를 즐겁게 했지
너는 우리에게 기쁨을 줬지
생활에 속고 사랑에 지치고
이웃에 실망할 때 정으로
재담으로 개그로 웃음꽃을 피웠지
사막과 같은 인생길에
마음을 달래 주고 웃음 주는
너는 사막의 장미
우리의 오아시스다
사랑해
「내 친구」 전문
시인은 친구를 전면前面에 내세워 객관적 시점에서 자기 자신을 조명하고 있다. 「내 친구」의 주체는 친구가 아니라, 화자인 자기 자신이다. 그가 삶의 현장에서 ‘전투하듯 열심히 살아왔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꿋꿋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잘 분화된 아니무스animus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연을 ‘사랑해’라고 단 3글자로 함축한 것은 등가성等價性의 원리를 성공적으로 적용한 경우다.
또 다른 시 「맑은 마음」에서도 잘 분화된 아니무스를 발견할 수 있다. 4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각 연의 화두를 똑같이 ‘너는 흔들리지 않고 서 있다’로 시작한 점이 주목된다. 같은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것은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화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강하게 담겨있다. 그러고 나서 ‘주식거래’, ‘가상화폐’, ‘천만 송이 꽃봉오리’ 등 세상적인 유혹들을 나열하면서 결코,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굳은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김인녀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아니무스animus 성향의 작품이 자주 발견되는데,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면에 형성된 건강한 아니무스로 분석된다. 이른바 잘 분화된 아니무스animus는 진취적인 정신, 용기, 진실성, 그리고 합리적인 성격으로 유도하여 사고력을 발휘한다.
김인녀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인연의 열매』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앞으로 더욱 정진하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