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 살았고 시인으로 죽었다.”-마리나 츠베타예바
“나는 말의 위력을 안다.”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마야콥스키의 ‘한계 체험’은 삶과 미학을 구별하지 않고 정치적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간다. 그것은 경계를 넘어 모종의 끝까지 가려는 자를, 정말로 고독의 끝까지 밀고 가 버린다.” - 이장욱(시인)
● 러시아 아방가르드와 미래주의의 기수,
언어를 혁신하고 세계를 바꾸다!
시와 회화의 경계를 섞고 삶과 예술을 통합하다!
혁명의 시대(1905~1917년)는 아방가르드라는 전 세계에서 유례없는 혁신적인 예술을 러시아에 선사했다. 정치, 사회적 혼란 속에서 ‘혁명’과 상응하는 급진적인 예술 실험이 문학뿐 아니라 회화, 음악, 연극, 영화 등 러시아 예술 전 분야에 걸쳐 다채롭게 이루어졌다. 마야콥스키는 이러한 러시아 아방가르드, 특히 미래주의 경향을 이끌었던 상징적 인물이다. 1911년 전업 화가가 되고자 미술 학교에 입학한 마야콥스키는 다비드 부를류크를 비롯하여 이후 문예사를 바꿀, 미래주의를 함께 이끌 동료들을 만난다. 완전히 새로운 언어, 완전히 새로운 예술,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던 젊은 예술가들은 “대중적 취향에 따귀를 때리라” 외치며 모든 전통과의 단절을 표방했다.
마야콥스키는 이러한 러시아 미래주의의 기수로서 파괴적인 영향력의 문예 운동을 주도했지만, 또한 동료들과 차별화된 지점을 보여준다. 급진적인 언어 실험의 결과물인 러시아 미래주의 시는 대부분 난해하고 심지어 내용 파악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마야콥스키에게 시란 미학이라는 이름 아래 밀폐된 언어 실험이 아니라, 현실 시공간과의 내면적 소통을 통한 ‘삶의 예술’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시 언어는 특정 부류의 자족적인 예술 실험이 아니라, 세계와 연결되고 소통하며 그로써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의지로 빛난다.
신경이 곤두선 바이올린,
졸라 대다가 이내 아이처럼
울어 댔다.
참다 못해 북이 하는 말.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다 지쳐
바이올린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분주한 쿠즈네츠키 거리로
황급히 떠났다.
가사도 없이,
박자도 없이
울고 있는 바이올린.
(......)
“머저리,
울보,
눈물이나 닦아!”
나는 일어나
비틀비틀 악보를 지나,
두려움에 몸을 굽힌 악보대를 지나 기어갔고,
무슨 까닭인지 외쳤다.
“맙소사!”
나무 목에 매달리며 말했다.
“바이올린아, 알고 있니?
우리는 지독히도 닮았어.
나 역시
외쳐 본들
아무것도 증명할 수가 없어!”
-「바이올린과 약간의 신경과민」, 『바이올린과 약간의 신경과민』에서
내가 좋아했거나 좋아하는 당신들,
성화(聖畫)처럼 동굴 속 영혼에 보존된
당신들 모두를 위해
나는 시가 가득한 해골을
축배의 와인 잔처럼 들어 올리리.
자꾸만 드는 생각.
내 삶의 끝에 총알의 마침표를
찍는 게 낫지 않을까.
만일을 대비해
나 오늘
고별 연주회를 열리라.
-「척추 플루트」, 『바이올린과 약간의 신경과민』에서
마야콥스키의 특별한 점 중 하나는 그가 시인이기 이전에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 화가였으며, 그의 삶과 창작에서 시와 회화는 별개의 장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빛과 색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회화적 인식은 20세기 초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그에게 회화는 창작의 주된 주제이자 형식이었다. 미술과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만들어 낸 새로운 언어와 이미지는 지면에 국한되지 않는 방향의 예술로 뻗어나간다. 그의 창작 세계에서는 광선주의, 입체파, 구축주의 등 회화의 영역과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나는 컵으로 물감을 뿌려
일상의 지도를 단숨에 지워 버렸다.
나는 아스픽 접시에서
대양의 비뚤어진 광대뼈를 보여 주었고,
양철 물고기 비늘에서
새로운 입술의 부름을 읽었다.
그런데 당신은
빗물 홈통을 플루트 삼아
녹턴을
연주할 수 있는가?
-「그런데 당신은 할 수 있는가?」, 『바이올린과 약간의 신경과민』에서
● 혁명 시인이라는 이름 아래 가려진 예술가의 고뇌를 만나다
1917년 소비에트 혁명은 시인에게 세계의 혁신을 의미했다. 혁명 이후 창작을 포기하거나 도피를 선택했던 이들과는 달리, 마야콥스키는 정치와 예술을 통합한 혁신을 실천하고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선전 선동 시와 국영 기업의 광고 포스터 작업을 하는 등 큰 변화를 감내한다. 게다가 그는 명석함과 자유분방함을 타고난 궁핍한 십 대 소년으로서 일찍이 자연스레 마르크스주의 혁명에 끌렸으며 사회주의 사상 선전 활동으로 인해 성년이 되기 전 이미 세 차례의 수감 생활을 겪은 바 있다. 이러한 마야콥스키의 이력은 사후 그를 ‘혁명 시인’으로 만드는 매력적인 재료가 되었다. 소비에트 비평의 틀에 박힌 서사 속에서 시인은 영웅이 되었으나, 이는 동료 시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말처럼 ‘제2의 죽음’, 즉 시인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아니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당했을 뿐이다.
그러나 1917년 이전의 소위 미래주의 시기와 비교하여 지금까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이 시기의 작품에 대해, 예술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그저 폄훼하고 제대로 살펴보지 않는 것 또한 온당한 평가는 아니다. 정치와 예술의 딜레마는 마야콥스키의 생애 전반에 반복되고 있으며, 그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억압이 강할수록 자유로운 영혼의 펄떡임은 더욱 드러나기 마련이다. 소비에트 체제 아래 격변의 현실을 살아내며 예술가로서의 창조의 고갱이를 지키고자 했던 고군분투는 이 시기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시인들이란
노련한 족속.
시?
좋지.
압운만 있으면 그만인 것을.
5월에 관한 시보다
더
저속한 건 없었어.
-「5월 1일」, 『바이올린과 약간의 신경과민』에서
믿고자 했던 정치 혁명에 의해 예술 혁명이 폐기되고, 더 이상 ‘목청을 다하여’ 노래할 수 없는 시대의 암흑을 마주한 마야콥스키는 자신의 ‘창작 20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이러한 비극적 인식을 담은 유언시를 대중 앞에서 낭송한다. 이 마지막 목소리를 끝으로 그는 1930년 4월 14일 서른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권총 자살로 자신의 생을 마감한다. 그의 창작은 내용과 형식, 인간과 시인, 삶과 예술, 나아가 정치와 예술 간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발전했다. 그의 죽음은 혁명 이후 ‘12년간 천천히 진행’되고 있었다고 지적했던 동시대 시인 마리나 츠베타예바는 또한 그가 “시인으로 죽었다.”라고 말했다. 그의 후반기 창작 세계는 실존의 마야콥스키와 시인 마야콥스키가 치열하게 분투한 현장이었다. 그의 죽음은 한 인간의 죽음이 아닌 시의 종말, 그리고 20세기 초 위대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종언이자 예술 혁명으로서의 미래주의의 끝이었다.
나 역시
선전 선동 시는
신물 날 지경.
나 역시
당신들에게 로맨스를
지어 줄 수 있었건만.
그것이 돈벌이도 되고
매력적인 일이니.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누르고
내 노래가 흘러나오는
목구멍에
올라섰다.
-「목청을 다하여」, 『바이올린과 약간의 신경과민』에서
● 1973년 시작한 국내 최고(最古) 문학 시리즈!
‘카르페 디엠’의 시인 호라티우스로부터 영화 「패터슨」의 시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까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모더니즘의 대표 작품 『황무지』, 『악의 꽃』, 페르난두 페소아, 미국 시문학계의 이단아 찰스 부코스키, 19세기 대표 시인 에밀리 디킨슨 등 반세기 동안 엄선된 시선집으로 가장 오랜 생명력을 이어 오고 있는 국내 최고 문학 시리즈 ‘세계시인선’은 앞으로도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