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라면 ‘전봉준’이란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먹먹해질 것이다. 거기에 이 『전봉준 평전』을 읽으면 더욱 처연한 심정이 든다.
동학 연구의 권위자인 저자가 1982년에 처음 출간한 이래 판을 거듭하면서 독자의 사랑을 받았던 이 책이 이번에 개정 4판으로 새롭게 나왔다. 지금까지 60여 권의 저서를 펴낸 저자는 자신이 ‘이 책의 저자’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한다. 일찍이 동학 연구를 시작해, 이 책에는 다른 전봉준 연구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 자료가 들어있다. 저자는 자신이 “시대적으로 갑오동학농민혁명을 몸소 겪었거나 전봉준을 만났던 인물의 증언을 들은 마지막 세대”라며, 1961년부터 동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호남과 충남지역에는 동학군에 참여한 경험이 있거나 어린 시절 전봉준을 만난 적이 있는 80대의 노인들이 살아 있었고 그들 덕택에 다른 연구서와는 큰 변별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전봉준의 외손녀, 전봉준의 동지인 나사일의 손자로서 전봉준을 곁에서 본 나홍균, 김덕명의 손자, 김개남의 손자, 손화중의 손자, 옹택규의 손자, 청류암의 신도 등이 그들이다. 20년간 자료와 관련 인물을 찾아 5천여 킬로미터를 달렸고 전봉준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다 거쳐간 “모든 곳과 모든 길”을 찾아다녔다. 따라서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전봉준을 쓸 때 나를 밟고 넘어가지 않고서는 이보다 더 세밀한 글을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전봉준을 ‘영웅’이라는 측면에서보다 ‘사람 냄새 나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리고자 했다. “전봉준은 조국의 운명을 책임져야 할 지배층도 아닌 한낱 시골 서생에 지나지 않았으나 춘추대의를 위해 죽었다. 나는 그의 삶을 증언하고 그 이야기를 후대에 들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은 인문학적 요소와 저널리스트적인 현장감이 들어있어 읽기 시작하면 바로 빠져드는 흡입력이 있다.
이 책에는 초판 서문을 비롯해, 3판, 4판의 서문이 나란히 들어있어 책의 역사성을 보여 주고 있다. 본문은 난세, 태어남, 만남, 횃불, 2차 기포(起包), 음모, 전봉준은 과연 동학도였을까?, 조선의 십자군 : 3차 기포, 떨어지는 별 등 모두 9장으로 구성돼 있고 부록으로는 전봉준이 취조를 받았던 공초(供草)의 원문과 번역, 그리고 저자의 전봉준 유적지 답사기가 수록돼 있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대목을 몇 가지만 짚어보면, 그 하나는 호남 차별의 역사성을 짚어내고 있는 지점이다. 곡창지대가 수탈의 장소가 되었고 또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는 왕건의 훈요십조에서 호남 차별이 시작되어 미륵신앙을 통해 원통함을 풀고 있던 민중들에게 전봉준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전봉준이 ‘동학교도’라는 사실에 의문을 표시하여 천도교와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저자는 전봉준이 동학에 입교했음을 보여 주는 어떠한 사료도 없으며, 그가 접주였다는 주장은 최시형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기정사실화한 것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전봉준은 접주이기는커녕 동학교도조차도 아니었다. 그는 후세 사가들의 곡필로 동학도로 규정되었을 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전봉준의 출생지가 정읍이 아닌 고창군 덕정면 죽림리 당촌마을이라는 것. 저자는 이기화 고창문화원장이 오랜 추적 끝에 이러한 사실을 밝혀냈다며 당촌 일대의 구전, 전봉준의 족보, 그리고 선대와 형제의 묘소를 추적하면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다고 말한다. 한편 전봉준 유적지 답사기에서 저자는 마지막으로 전봉준이 머물렀던 백양사 청류암에서 전봉준이 남긴 글씨를 찾아 책에 수록했다.
저자는 서문에서 전봉준이 처음 고부민란을 일으킨 1894년 1월이 동학혁명기념일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 2차 기포가 있었던 1894년 5월에 맞춰 기려지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5공 시절 성역화 사업을 한다며 막대한 보조금을 내려보내는 과정에서 고창과 정읍 사이의 주도권 싸움이 벌어져 이런 역사왜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금이라도 여기에 동원된 학자와 정치인들이 정도(正道)로 나가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곡진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