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OP으로 ‘원론’을 쓰다?! - 아는 만큼 들리고 아는 만큼 보이는 K-POP
근본이 되는 이론, 또는 그런 이론을 기술한 책. ‘원론’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흔히 경제학이나 교육학 같은 학문 뒤에 어울리는 이 말이 K-POP과 접속했다. 『한글의 탄생』으로 주시경학술상과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은 언어학자 노마 히데키가 해설하는 K-POP의 근본 이론이란 무엇일까? 아니 K-POP을 굳이 이론적으로 공부하며 들어야 할 일인가? 답을 찾기 전에 먼저 이 책 저자의 입장 몇 가지를 확인하자.
1)최근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 기획사의 성격이나 행태는 다루지 않는다. 음악 산업 자본과도 결탁하지 않는다.
2)K-POP의 담당자를 ‘아이돌’이라는 낡은 관념으로 좁은 테두리 안에 묶어 놓는 ‘올드 아이돌론’에 가담하지 않는다. ‘비주얼 담당’이라는 말에 담긴 인간 소외 사상에도 분명한 반대를 표명한다.
3)K-POP 뒤에 도사린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선을 긋는다. 그러므로 외부인의 시선으로 K-POP의 매력을 외치는 ‘국뽕’ 충만한 책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미뤄두자. K-POP의 ‘K’는 ‘대한민국Korea’이라는 국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는 ‘한국인Korean’의 것이라고도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멀티에스닉한 성격을 띠고 있다. “아무도 온전하게 언어화하지 못하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K’. 그것을 지탱하는 기반은 무엇일까? 답은 나중에 밝혀질 것이다. 어쨌든 ‘K’는 엄격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어렴풋함과 희미한 베일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실은 아주 강인한 정체성이다.” 저자가 말하는 ‘K’의 실체는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드러난다.
『K-POP 원론』은 사회학, 마케팅론, 미디어론, 저널리즘 등 주변 담론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YouTube 속 동영상을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서 자리매김하는 ‘작품론’을 지향한다. 즉 우리 시대의 아트로서, 우리 시대의 세계상(世界像)으로서 K-POP MV를 바라본다. MV 속의 분석 대상은 당연히 노래 가사와 랩과, 선율, 댄스, 그리고 영상의 이미지와 색채다.
K-POP의 매력을 보여주는 키워드1- 신체성
저자는 K-POP이 디지털과 가상현실 세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과 LAVnet을 철저하게 이용하면서도 그와 전혀 상반되는 사람의 ‘몸’을 극한적으로 추구하는 점에 주목한다. ‘신체 그 자체’가 아니라 ‘신체성을 공유’하는 생태를 실현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저 칼군무 같은 아티스트의 현란한 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체로 부리는 작은 몸짓, 장난, 익살, 표정과 같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동작을 뜻하는 ‘앤틱스’까지 팬들과 공유하며 연대를 꾀한다. 아티스트와 팬에 덧붙여 단순히 찍는 장치를 넘어서서 ‘함께 춤추는=신체화된 카메라’까지 가세한다. 새로운 신체성의 포효는 2013년 MAMA에서 EXO가 펼친 기념비적 퍼포먼스 〈으르렁〉 무대에서 시작하여 2018년 BTS의 〈Airplane pt.2〉을 거친다. 그리고 아바타를 등장시킨 초기의 디지털 환상 노선을 벗어난 에스파의 〈Supernova〉(2024)까지 세대를 이어 진화해 간다.
키워드2-한국어 소리: 성문 폐쇄, 종성의 힘, 오노마토페(의성의태어)의 유토피아
K-POP의 ‘언어’를 분석하는 3악장은 기존 K-POP 관련 서적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저자만의 ‘킬포’(Killing point)에 해당한다. “왜 세계 각국의 팬들이 뜻도 알 수 없는 한국어 목소리와 랩에 꽂히는가?”라는 질문에 관한 답이 하나씩 밝혀진다. 영어의 전유물이었던 랩이 한국어로도 가능할 뿐 아니라 일본어를 포함한 다른 언어에 비해 유리한 점은 무엇이었을까? 우리에겐 익숙해서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 한국어 소리의 비밀은 비모어 화자들에게는 낯설고도 매력적인 요인이 된다. 이를테면 성문을 닫아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를 차단함으로써 모음을 끊는 성문 폐쇄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 한국어의 음절 끝에 오는 일곱 개 자음이 철저하게 폐쇄되는 비개방성이 대표적인 예이다. IVE의 〈Love Dive〉와 BTS의 〈피땀눈물〉, 스트레이 키즈의 〈매니악〉 등의 첫 소절부터 강타하는 이러한 보컬의 비법은 더할 나위 없는 밀도감과 긴장감을 선사한다. 세계에서 오노마토페(의성·의태어)가 가장 풍부한 언어 1위로 알려진 한국어이기에 K-POP에는 의성어, 의태어의 유토피아가 펼쳐진다.
키워드3-다원주의
저자가 꼽은 K-POP의 표현양식상의 특징을 가장 넓은 범위로 아우르는 용어가 있다면 ‘다원주의’다. 이 성격은 그룹의 구성뿐만 아니라, 작품 자체가 가진 선율과 가사 등 전방위에서 확인된다. K-POP 그룹의 구성원뿐만 아니라 크리에이터(작곡작사가, 안무가, 프로듀서)까지 이미 전 세계에서 모여든 다민족적이고, 다문화적인 멀티에스닉(multiethnic)한 성격을 축으로 삼는다. 이렇게 다양한 집합체가 서로가 서로의 존재감을 두드러지게 부각하는 비전체주의, 비획일주의를 지향한다. 가사 역시 한국어뿐만 아니라 영어,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 등 두 개 이상의 언어가 유기적으로, 또는 유희적으로 결합하는 복수언어성(plurilingualism)을 지향한다. 사운드는 복수의 선율과 서로 다른 ‘존재론적 목소리’가 어우러져 멀티 트랙으로 진행하며 다성성(polyphony)을 부각한다. 가사 작법의 측면에서 보면 이야기성(narrative)을 강조하는 계열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시구의 조각조각들을 집적하여 구축해 나가는 계열이 풍요로운 변화와 다원성을 뒷받침한다. 이는 소리, 선율, 말, 사물, 영상 등 다양한 대상을 골라 수집하여 단순히 배열하는 게 아니라 고속으로 변용시켜 소리와 이미지의 새로운 동적 조형을 창출해 내는 브리콜라주(bricolage)라는 노마 히데키식 K-POP의 정의와도 부합한다.
키워드4-코레아네스크
인상주의, 리얼리즘, 팝아트 같은 미술사의 유파를 부르듯 K-POP 나름의 독특한 표현양식과 스타일을 이 책에서는 코레아네스크(Koreanesque)라는 용어로 부른다. 간단히 ‘코리아풍’ 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단순한 ‘한국적인 것’을 그저 갖다 붙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변형되는 섬세한 색채로 대표되는 ‘전통의 21세기적 메타모르포제(변형)’를 여러 편의 동영상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K-POP을 향한 애정 어린 진단과 제안
저자는 1970년대 학창 시절, 김민기, 양희은 등의 저항가요와의 만남에서 시작된 한국 대중음악과의 인연과 애정을 고백한다. 1990년대 초반 서태지와 듀스 등이 견인한 힙합 혁명이 K-POP의 여명을 밝혀주었다고 말하며, 2010년대 유튜브의 성장과 연계되는 LAVnet의 시대부터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한다. 정확히는 제3세대, 제4세대, 그리고 동시진행형으로 등장 중인 제5세대까지의 아티스트가 이 책의 주인공들이다. 그렇다면 바야흐로 세계를 석권했다고 평가 받는 K-POP의 미래에 관해서는 어떤 전망을 내릴까. 오로지 작품론을 지향한다고 했지만, K-POP의 위기설과 다양한 잡음도 끊이질 않는 현장에서 인문학자이자 미술가, K-POP의 열혈 팬 노마 히데키가 내리는 진단과 다음과 같은 과제는 다양한 시사점을 전해줄 것이다.
(a) ”변화를, 변화를, 그리고 더 많은 변화를!
(b) 아티스트와 팬덤에 기대지 말기를!
(c) 전체주의, 집단주의, 밀리터리즘과 결별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