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타는 몸과 휠체어에 실린 몸
자전거 앞바퀴 살에 걸린 나뭇가지 하나가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 있다. 몸은 이렇듯 우연과 운명의 간섭에 취약하다. 빅토리아 시대의 문학을 통해 그 시대와 여성 문제를 연구하던 퀴어 페미니스트 학자이자 왕성한 활동가이기도 했던 크리스티나 크리스비는 쉰 살 생일을 갓 넘긴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자전거 사고로 운명이 갈라진다. 지나가던 차에 타고 있던 사람이 달려와 간신히 죽음을 면하지만, 그때까지 눈부시게 충만하고 자전거와 오토바이로 거리를 질주하는 것을 즐기던 “강인하고 유능하며 매력적인 여성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얼굴의 뼈가 부서지고 목이 부러지면서 척수가 손상되어 전신이 마비되고 몸의 순환계도 망가져 버렸다. 이 갑작스런 변화가 준 충격의 강도는 그녀에게 사고의 순간에 대한 기억도 지웠고 이제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기본적인 신진대사의 처리도 불가능한 몸이 되었다. ‘납덩이의 시간’의 시작이었다. 그 후 응급실에서 재활병원으로, 그리고 집으로 옮겨진 그녀는 2년 뒤 재직했던 웨슬리안 대학교에 반일제 연구교수로 복귀하여 학생들에게 강의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녀의 몸은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도 없고 손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불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척수가 손상된 그녀의 몸은 시도 때도 없이 전기가 흐르는 신경학적 폭풍이 휘몰아치는 황무지일 뿐이었다. 파괴된 몸속에서 이해의 영역을 벗어난 삶을 살아야 하는 그녀에게 만족스러운 결말 같은 것은 없었다(꿈꾸지도 않았지만). 18년을 지탱하던 그녀의 몸은 끝내 작동을 멈췄다.
『와해된, 몸: 크나큰 고통 이후를 살아가다』는 2016년 세상에 나온 그녀의 회고록이다. 그녀가 언제부터 글을 썼는지(쓸 수 있었는지), 혹은 쓰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죽음과 같은 잠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아니면 티슈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의 손에 절망하고, 수도 없는 시도 끝에 연필을 거꾸로 잡고 지우개로 책장을 넘기게 된 순간부터? 그녀의 말처럼 “고통에 울고, 비명을 지르고, 격노하는 것은 언어가 와해되었다는 징후”이다. 용량을 초과하는 끝없는 고통에 괴로워 했겠지만 그녀를 견딜 수 없게 했던 것은 이 징후일지 모르겠다. 그녀를 지탱하게 했던 것은 언어의 범주를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자신의 끔찍한 몸을 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촘촘하고도 고집스러운 욕구였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녀는 이 욕구를 끈질기게 실현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녀의 글이 세상에 책으로 나왔을 때, 사람들은 처음 당황했고, 놀라워했고, 마침내 사로잡혔다. 그것은 무엇보다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한 지독한 일기이자 생존에 대한 복잡한 긍정이기도 한 이 책이 지금까지의 장애/고통 서사와 다름에서 오는 것이다. 그간 접해온 고통을 이야기하는 방식과는 다른 그녀의 글쓰기는 우리를 새로운 미지의 감각과 경험으로 이끌어 간다. 그것은 생을 긍정하기 위해 의식/무의식적으로 건너뛴 어두운 자리들을 드러낸다. 무엇이며, 어떤 것들일까?
크나큰 고통 이후-척수 손상의 황무지를 걷는 여행
사고든 질병이든 그로 인한 장애와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들은 적지 않다. 그러한 이야기들은 태어날 때 발견되는 ‘결함’으로 추정되는 것, 유전적 이상, 치명적인 사고의 순간부터 시작되며, 대부분의 서사는 대개 선형적인 시간순으로 전개되고 사건들 또한 결과 순을 따른다.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공통점은 그러한 서사들이 저마다의 절실한 사연을 지녔음에도 거의 어김없이 고통을 겪는 이가 시련을 거쳐 절망을 극복하고 교훈을 얻는 긍정적인 결말로 나아간다는 데 있다(물론 세상에 새롭게 존재하는 방식으로서 장애를 수용하고 심지어 축하하는 이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결코 나쁘지도 해롭지도 않다). 독자들은 잃어버린 능력을 되찾거나 새로운 능력을 발견하려 애쓰는 인물들을 따라 그 상황으로 들어가고 공감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이야기 속에 몰두한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적 삶의 궤적이 구조화된 공통의 지평선이 발견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들은 오래전부터 우리 안에 내면화되어 있고 기대하는 인간적 삶의 공통된 서사 구조(빅토리아 시대의 문학 연구자인 크로스비가 “리얼리즘‘ 서사라 부르는)와 진행 방식을 아주 닮아 있으며,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극적으로 확인하고 싶어 그러한 장애/고통 서사들을 찾아 읽으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와해된, 몸: 크나큰 고통 이후를 살아가다』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크로스비는 몸이 타들어 가고, 충격의 정도가 배가된 전기가 피부 밑으로 두껍게 지속적으로 흐르는, 다시는 완전히 회복되지 않을 뒤엉킨 신경이 흉포하게 윙윙거리며 몸속을 활개 치고 돌아다니는 ‘진짜 지옥’에 살게 되었음을 알고 절망하지만,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출구 같은 것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무것도 극복하려 하지 않으며 초월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무너진 채로, 부서진 그 자리에서 난파된 자신의 몸속으로 깊이 들어가고자 한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 구절처럼 “얼어붙은 사람이, 눈을 생각해 내듯” 일상을 잔인하게 쪼개는 몸속의 고통과 두려움을 낱낱이 헤집고 셈하는 그녀의 글쓰기는 주디스 버틀러의 표현처럼 “번뜩이는 정밀함으로 타오르는” 고통의 해부도를 그려간다. 그녀는 이를테면 “잃고 나서야 상실한 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식의 이성적 조언 따위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정동이 이끄는 지점까지 나아가려 한다. 그것은 시간순도 따르지 않고, 인과도 드러나지 않는 삶의 여러 장면들을 오간다.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한때는 자신의 삶이었던 것에 다가가는 데 골몰하고, 이제는 온전히 체감할 수 없는 자신의 육체적 욕망 어느 것 하나도 비루한 것으로 내던지거나 포기하지 않는, 삶의 짐을 내려놓고 싶은 유혹을 밀어내며, 무엇보다 손쉬운 자기 연민과 고난 극복의 서사에 저항하면서 스스로의 삶을 재정의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녀의 글쓰기는 “우아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책”으로 남아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취약한 몸, 타자들, 존재(관계)의 해부학
그렇다고 하여 『와해된, 몸: 크나큰 고통 이후를 살아가다』를 고통의 해부학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이 책의 절반만 이해하는 우를 범하는 일이다. 이 책은 ‘존재(관계)의 해부학’이기도 하다. 책의 첫 시작에서부터 크로스비는 응급실 침대에 누인 자신의 와해되어 버린 몸이 이제는 누군가의 크고 작은 도움 없이는 동물적 생존도 불가능해져 버렸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녀의 연인 자넷은 치명상을 입었지만 ”인격personhood“을 잃지는 않았다고 위로했지만 이미 내장 깊숙이 상처받았다는 것을 실감하면서부터 ’나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완전히 소외되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인간적 삶에 필수적인 일관된 ’신체적 자아‘조차 손상되어 혼란스러운 그녀를 끌어당겨 공동체의 일부로 살아남게 한 것은 그녀에게 다가오고 그녀를 둘러싼 타자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녀의 깊고 무지막지하고 압도적인 고통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지만, 파괴된 몸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너절하고, 취약하며, 퀴어할 수 있는지를 전하는 그녀의 글은 우연과 운명의 간섭에 취약한 우리의 몸과 상호의존성과 서로의 존재를 지탱하는 능력에 대해 숙고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상 우리의 몸에는 늘 구체적인 타인이 깃든다.”(김원영,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 문학동네, 2004, 9쪽. 옮긴이 후기에서 재인용) 우리는 언제까지나 취약한 몸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위태로운 존재들이지만, 삶을 살아갈 만한 것으로 만드는 용기도 이 존재들의 얽힘에서 나올 것이다. 코로나 시대를 거치며 자기 보존의 기술과 상품이 더욱 넘쳐나는 오늘도 여전히. 언제까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