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과 경의를 담아
검질긴 집념으로 완성해낸 역작
한국 영화평론계에서 정성일이라는 이름은 고유한 위치를 갖는다. 전심으로 영화를 마주하고, 필사적으로 영화를 보고, 전력을 다해 글을 쓰는 평론가.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몇 번이고 돌려 보며 영화가 던지는 질문의 답을 찾아가고, 다시 질문하는 사람. 무엇보다 순도 높은 애정으로 오직 영화를 사랑하는 일에 천착하는 외골수.
그는 특히 좋아하는 감독을 향해 뿌리 깊은 지지와 신뢰를 보내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왕빙은 이른바 정성일의 "목록" 가운데 2000년 이후 단연 눈에 띄는 이름이다. 아직 국내에 정식으로 개봉된 작품이 없어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지만 공개하는 작품마다 세계 주요 영화제에 초청받는 것은 물론, 평론가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정성일은 영화와 평론 쓰기에 권태를 느낄 무렵 〈철서구〉를 만났고, 곧바로 왕빙이란 이름이 자신의 영화 인생에서 긴요한 자리에 놓일 것임을 직감했다.
정성일은 20년 동안 눈앞에 도착하는 왕빙의 작품들을 "저항" 없이 "환대"했다. 때로는 글을 썼고, 때로는 쓴 글을 폐기하며 왕빙을 따라갔다. “찍는다는 것은 내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카메라를 든 내게 내려진 의무”라는 왕빙의 엄중한 말 앞에서 정성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제 오직 왕빙에 관한 책을 펴내게 되었다. 쉼 없이 글을 쓰면서도 좀처럼 책으로는 묶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왕빙에게 할애하는 정성일의 지극정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비로소 이미지와 대상, 대상이 놓여 있는 장소, 사진을 찍는 나와 대상이 놓여 있는 틈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시작했어요. 이제 내게서 모든 이미지는 리얼리티를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건 작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이라고 부르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언제나 사실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이상의 것을 찍어야 했습니다. 이제 나에게 찍는다는 것은 내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카메라를 든 내게 내려진 의무라는 걸 알았습니다. 나는 여기서, 사진과 나, 세상과 나 사이에서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이 태도를 믿고 지켰습니다.”
_본문에서
“카메라는 아무것도 과장하지 않고 있다”
영화감독 왕빙에게 배운 것
『나의 작가주의』는 영화감독 왕빙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책으로도 의미가 깊다. 그의 영화는 (비교적 짧은 영화들도 있으나) 긴 상영시간으로 유명한데, 그중에는 16시간 30분에 달하는 작품(〈15시간〉)도 있다. 거기에 더해 실존 인물의 삶과 말을 담은, 편집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다큐멘터리에 관객은 종종 감독의 의도나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애를 먹기도 한다. 이에 정성일은 왕빙의 영화를 볼 때 작품이 상연되는 무대가 "중국"이라는 점, 그의 영화가 다름 아닌 "다큐멘터리"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 책에서는 아홉 편의 영화를 중심으로 왕빙의 작품 세계를 샅샅이 들여다본다. 그에 따르면 왕빙의 작품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간 공장노동자에 관한 영화,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시기에 반동분자로 분류되어 강제노동수용소에 보내졌다 돌아온 피해자들에 관한 영화로 크게 나뉘고, 그 사이에 중국 정부의 관리와 보호 바깥에 버려진 이들을 다룬 영화가 존재한다.
왕빙 또한 어린 시절 대약진 시기 기근에 시달렸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아야 하는 국가정책에 따라 열네 살 때부터 돈을 벌었다. 문화혁명과 천안문사건을 겪으며 자란 그는 자연스럽게 역사의 흐름 속에서 소외되고 사라져가는 사람들의 생의 소리를 듣고 기록하기 위해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정성일은 역사의 증인들 앞에서 어떤 연출이나 왜곡 없이 증언을 경청하고, 그럴싸한 미사여구 대신 “그저 찍는다”는 말로 자신의 방법론을 설명하는 왕빙에게서 영화를 찍는 자리에 선 사람의 태도를 배웠다고 고백한다.
왕빙은 원칙보다 자기 카메라 앞에 서 있는 인물이 훨씬 중요하다고 믿는다. 거기에 카메라가 존재하지만 실존하는 것은 항상 그 인물이다, 라는 상위 원칙. 왕빙은 그것을 이항대립으로 만들지 않았다. 지금 여기, 라는 장소에 영화가 있음을 의식하면서 질문을 제기하는 특별한 존재자의 실존에 대해 그걸 내내 열어놓는 행위, 를 왕빙은 그저 찍는다, 라는 말로 내게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제까지 모두들 내게 어떻게 찍는지에 대해 설명하려고 애썼다. 왕빙은 그저 찍는다, 라는 말로 자기의 방법을 정식화시켰다.
_본문에서
최대한 디테일하게 영화 장면과 촬영 현장을 독자의 눈앞에 가져다 놓으려는 정성일의 안간힘 덕에 머릿속에는 생생하게 이미지가 그려지고, 왕빙 작품에서 카메라와 대상 사이의 거리감은 어떻게 조성되는지 가늠할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왕빙에게는 "지금, 여기" 있음에도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을 싸우듯 담아내는 일이 시급하다고 정성일은 말한다. 그러면서 촉구한다. 눈을 돌리지 말자고, 왕빙의 영화에 동참하자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