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의사의 개원 일기
전문의로, 봉직의로 생활하다 개원을 결심하고 병원장이 되는 과정에서 겪은 다양한 갈등과 고민을 일기 쓰듯이 진솔하게 풀어냈다. 의사로서 겪는 자본과 노동의 이중적 역할에 대한 내적 갈등을 고백하고, 환자를 돌보는 행위가 단순한 의료 행위에 그치지 않고,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저자의 경험과 현실적 제약을 얘기한다.
저자가 개원하는 과정을 읽다 보면 우리 의료 시스템에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이 직면한 의료 문제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계약과 동시에 통장의 자금이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순간 나는 임금을 받고, 소소하게 돈을 모으고, 소소한 소비로 살아가는 삶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이제는 자본을 굴려야 하는 입장이고,
그 일은 결코 소소한 일이 아님을 조금씩 실감하기 시작했다.
나의 소시민적 성향과는 달리 경제 활동은 절대 소시민적일 수 없게 되었다. _p.36
한국에서 의사가 되고, 의사가 되어 병원을 준비하는 일은 온전히 개인의 노력에 의존한다.
(……) 그런데 건강 보험이 정한 수가 통제와 건강 보험 심사평가원이 정한
처방 기준을 따라야 한다. _p.57
개원하면 지역 사회에 공헌하겠다는 작은 다짐 같은 건, 예측되는 지출 앞에서 순식간에 쪼그라들어 흔적조차도 남지 않을 것 같은 작은 모래 알갱이가 되어버렸다. _p.63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의료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 책에서는 의료 시스템을 단순한 의료 서비스 제공자의 역할로만 정의하지 않고, 자본과 노동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분석한다. 저자는 봉직의로서 수년간 활동한 경험을 통해 의료의 자본주의적 모순을 체험했다. 특히 임금을 받는 노동자로서의 의사와 자본을 소유한 병원장 사이의 갈등, 이윤 창출과 의료 수가의 통제가 충돌하며 발생하는 딜레마를 솔직하게 얘기하고 있다. 개원의로서 자영업자가 된 후에는 자본의 소유자로서 환자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된 자신의 경험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풀어냈다.
저자는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행위가 단순한 노동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과정에서 자본과 노동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며 의료 시스템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의료 행위가 자본주의적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분석한다.
우리는 국가나 사회를 지탱하는 필수 서비스인 의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때, 의료인 개개인보다는 의료가 놓인 자본 구조에 좀 더 집중해야 한다. 내가 스스로 요리를 배우고, 자리를 알아보고, 대출을 받아 식당을 차리고 음식 장사를 시작했는데, 국가가 나서서 ‘음식 가격은 이 정도만 받으라’며 생각보다 적은 수준의 가격으로 통제한다고 가정해 보자. 사장의 기분은 둘째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국가의 통제를 납득할 수 있을까? _p.71
자본가인가 노동자인가의 문제로 보자면, 개원한 의사는 일반 영세 자영업자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존재다. 길을 가다 들른 작은 식당의 사장은 주방과 계산대를 오가며 음식을 만드는
노동과 식당 경영이라는 두 역할을 충실히 행한다. _p.111
어느 날 병원장의 호출을 받았다.
병원장과의 단독 면담 자리에서 들었던 말을 나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과장은 본인이 받는 월급의 네 배에서 여섯 배를 병원에 벌어 주어야 해요. 그래야 병원이 운영됩니다. 그런데 외과장은 두 배가 조금 넘는 정도를 벌어오네요?”
한 마디로 나는 병원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이제 병원을 그만두라는 말이었다. _p.156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의 구조적 모순을 파헤치다
한국의 의료 시스템은 세계적으로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이 책에서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다양한 구조적 모순을 말한다. 건강 보험 제도의 한계를 짚어내며, 의료 서비스의 가격 책정이 자본주의적 이윤 추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설명한다. 한국의 건강 보험 제도가 보편적인 의료 혜택을 제공하는 데 기여하고 있음에도, 그 시스템이 가진 근원적 문제점, 비효율성과 자본주의적 모순에 대해 속 깊은 얘기를 한다.
예를 들어, 저자는 의료 수가 책정 방식이 의사들의 노동 가치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결국 환자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지적한다. 저자는 이러한 구조적 모순은 의사로 하여금 단순히 수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의료 행위를 하게 만들고, 환자는 더욱 질 높은 의료 서비스를 받기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는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서 의료가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딜레마 중 하나로 설명한다.
또 저자는 병원 경영과 의사들의 의료 활동의 간극으로 의료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음을 말한다. 이와 함께 공공 의료의 중요성에 대해 논의하며, 현재와 같은 시스템이 지속될 경우 한국의 의료 시스템은 결국 붕괴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진단한다.
내가 고용한 직원들의 노동력들이 다양한 형태로 녹아들어 척수 신경 차단술이라는 하나의 시술에 응축된 가격이 57,950원이다. 솔직히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게다가 아무리 긍정적으로 받아들여도 이 가격이 그저 원가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쉽지 않다. 그저 원가 보존이 높은 시술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환자의 허리에 주사를 놓아야, 원가 수준의 가격이 쌓여 발생한 수익으로 나는 병원 경영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_p.135
분명한 사실이 있다. 첫째로 병원은 비급여 항목을 많이 시행하거나, 원가 보존이 높은 시술이나 검사를 되도록 많이 해서(과잉 진료를 해서) 이윤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2024년 전반기 벌어진 과도한 의대 증원 늘리기에서 불거진 기형적 의료 시스템과
의료 수가에 대한 여러 비판이 있었다. 이는 주먹구구식으로 시작되어 깊고
견고한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이제까지 흘러온
전 국민 의료 보험의 역사와 현재의 결과물에서 기인한다는 점이다. _p.139
2,000이라는 숫자가 무너뜨린 것
최근 대한민국 정부가 발표한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정책은 의료계 내부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저자는 단순한 인력 증가가 의료 시스템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의료 인력의 수요와 공급 문제는 단순히 숫자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적, 경제적 환경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정부의 정책이 의료 시스템의 근본적인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지를 말한다.
특히 의대 정원 증원 정책이 실질적으로 의료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가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 정책이 장기적으로는 한국 의료 시스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더 많은 의사를 배출한다고 해서 의료 시스템이 가진 자본주의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며, 이는 단순한 인력 부족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모순의 문제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2024년 전반의 의대 증원 논란에 찬성하는 의료 단체는 병원협회가 유일하다. 병원을 경영하는 입장에서 병원장으로서는 당연한 결과이다. 의사가 많아지면 임금이 낮아지고 좀 더 적은 비용으로 의사 인력을 고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임금이 낮아진다 해도 의사 인력을 충분히 고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윤 추구는 자본의 어쩔 수 없는 본성이기 때문이다. _p.161
대책 없는 2,000명 증원에 필수 의료과를 낙수과로 만들고 의사들을 범법자 다루듯 하는 정부에, 의사들은 냉정한 현실과 자존감의 무의미함을 깨닫는다. (...) 필수 의료 또는 요양 급여 진료 영역을 채워야 할 의료 인력들은 그렇게 점점 줄어들 것이다. 세상을 유지할 정말 필요한 의료보다는, 좀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는 의료 영역으로 의료 자원은 이동할 것이다. 아무런 계획도 생각도 없었던 정부의 무지하고 무리한 정책이, 그나마 근근이 버티고 있던 한국의 의료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있다. 그것도 철저한 자본 논리에 승복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_p.253
변화는 필요하다
저자는 목요일 오후 휴진을 하고 방문 진료를 다니는 경험을 통해 변화가 필요함을 얘기한다.
팬데믹을 대비하고 지역 의료를 유지하기 위한 공공 의료의 확장과 유지가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 의료 인력을 육성하는 데 국가가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관여해 사회 보장 서비스로서의 의료 통제에 정당성을 획득하는 방법을 말한다. 그러자면 지금의 의료 구조는 좀 더 입체적으로 변해야 하고, 변화한 구조 안에서 의사의 숫자는 지금보다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료는 자본의 속성과 거리를 두고 국가의 합리적 통제 안에 있어야 하며, 그런 합리적 환경에서 의사는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의료 서비스가 과연 가장 효율적인 방식인지 그리고 환자는 더 나은 의료 환경을 위해 어떤 부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의사들이 직면한 현실적인 고민과 환자들이 맞닥뜨린 의료 환경의 불균형을 조금 더 명확히 이해하고, 정부의 합리적인 정책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선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