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 언론의 출발
세계 가톨릭교회는 신자들에 대한 교육과 함께 복음을 널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서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 왔다.
그 가운데서도 교회는 특히 출판과 언론 활동을 통한 신자들의 교육과 미신자(未信者) 들에 대한 선교에 많은 힘을 기울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대중전달(Mass Communication)의 수단으로서 라디오나 TV와 같은 전파 매체(電波媒體)가 발달하기 전에는 신문· 잡지 등이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기 때문에 교회는 일찍부터 이에 관심을 두었다.
그리하여 17세기 말 ∼ 18세기 초 유럽 각국에서 근대적인 신문 · 잡지가 발행되기 시작할 때에 가톨릭교회는 이에 발맞춰 프랑스(1701), 영국(1790), 이탈리아(1848)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교회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에 부응(副應)하여 교황 레오 13세〔Leo XⅢ, 1878~1903 재위〕와 비오 10세[Pius X, 1903~1914 재위〕는 ‘모든 주교· 신부와 교우들이성교회(聖敎會) 신문과 잡지를 많이 발간하여 운영하고, 신자들은 물론 외교인(外敎人)들까지도 볼 수 있게 하라’고 촉구하였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도 일찍부터 출판을 통한 신자 교육 및 선교의 필요성에 관심을 갖고 이에 많은 도서를 목판본, 또는 활판본으로 간행해 온 바 있었다. 이러한 출판활동은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점차로 공개적인 선교활동이 가능하게 된 뒤에는 더욱 활발해졌다.
그러다가 한국교회는 1883년 우리나라 최조의 근대적 신문인 〈漢城句報〉가간행되고, 1886년에는 최초의 순 한글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이 간행된 이후 계속된 일간지(日刊紙)의 발행에 자극을 받는 한편, 앞에서 든 역대교황들의 촉구에 힘입어 1906년 10월 19일 순한글로 된 주간지(週刊紙)인 〈경향신문〉(京鄕新聞)과 그 부록인〈보감〉(室鑑)을 발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경향신문〉은 교회의 기관지(機關紙)이자 일반시사지(一般時事紙)로서 국내외의 교회와 사회소식, 논설, 그리고 일반 상식이나 생활에 필요한 지식, 문예작품 등 다양한 기사(記祖)를 싣는 한편, 그 부록인 〈보감〉에는 주로 신자를 대상으로 한 교리적 논설, 한국천주교회사, 법률 해설 등을 실어 알려줌으로써 천주교 신자들은 물론 일반 국민들에게 유익한 지식을 제공하고 계몽하는 데 큰 이바지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도 천주교를 그릇 이해하고 있거나, 좋지 않은 인상을 갖고 있던 비신자(非信者)들에게 올바른 인식과 호감을 갖게 함으로써 선교 및 호교(護敎) 면에서도 큰 몫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병(韓日合井) 이 되자 〈경향신문〉은 창간 당시부터 지켜왔던 ‘政敎分離에 입각한 政治不干涉主義"의 편집 방침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의 강요에 의해서 폐간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교회 당국은 총독부의 요구대로 1910년 12월 30일자, 제 220호로 폐간하고, 그 대신에 종교적인 내용만을 수록하는 《경향잡지》(京鄕雜誌)를 발간하기로 하였다.
1906년 10월 9일 창간된 〈보감〉의 후신인《경향잡지》는 일제의 탄압과 물자난(物資難)으로 한 때 폐간된 적도 있으나 [1945년 5월 15일 제 975호로 폐간 되었다가 해방 뒤인 1946년 8월에 속간〕 오늘날까지 발행을 계속 함으로써 교리, 교회 소식, 교회사, 법률 문답, 독자 투고, 문예 작품 등을 수록하여 신자 교육은 물론 가톨릭 문화의 보급 계몽과 전교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경향잡지》의 발행 이후 한국교회에는 아직 다른 잡지나 신문이 출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19년 3·1 독립 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족문화 운동과 청년운동의 열기(熱氣)는 각지에서 민족 언론기관의 창설과 〈東亞日報〉 〈朝鮮日報〉 등의 신문 발행, 그리고 각종 청년단체의 설립과 활동을 가져왔다.
이 때에 천주교회에서도 당시 교황 비오 11세[Pius XI, 1922~1939 재위〕도 촉구한 바 있는 ‘가톨릭운동’(Catholic Action) 의 일환으로 각 지방 본당에서청년회가 조직되어 청년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이러한본당 청년회들을 교구 차원에서 통합할 필요가 생기게 되어서 1922년 6월에는 서울에서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회연합회(京城敎巨 天主敎 靑年會聯合會)가, 1924년 7월에는 대구에서 남방천주공교청년회(南方天主公敎靑年會)가 발족하여 가톨릭청년 운동을 연합적, 체계적으로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에 두 청년연합회는 가톨릭 청년운동을 효과적으로 홍보(弘報) · 선전(宣傳)함은 물론 회원들과 일반 신자들의 교육, 호교(護敎), 전교 등을 위해서 기관지(機關紙) 발행의 필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하여 먼저 1927년 4월 1일 남방공교청년회에서는 "一은 南方敎匡內의 消息報道요, 二는 敎會發展에 對한 意見交換이요, 三은 步調一致“를 목적으로4·6배판 4면의 월간 신문인 〈天主敎會報〉 〔오늘날의 〈가톨릭新聞〉의 前身〕를 발간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에 자극을 받은 경성교구 천주교청년회연합회〔이하· 경성 청년연합회로 줄임〕 역시 기관지의 발행을 서둘러 3개월 뒤인 같은 해 7월 10일자로 〈별〉보를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천주교회보〉와 〈별〉보는 서울과 대구의 두 청년연합회 기관지로서 서로 선의(善意)의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한국학자료원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