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서는 프랑스 제도주의 마르크스주의자 내지는 ‘조절학파’(école de la régulation)에 속하며, 프랑스의 대표적 진보 경제학자 겸 정치철학자 프레데리크 로르동(Frédéric Lordon)의 문제의 저작 “Capitalisme, désir et servitude - Marx et Spinoza”(2010)의 완역이다.
본서는 역자와 진인진 출판사가 시리즈로 기획한 권력에 관한 담론 총 세 권 중, 두번째 서적이다. 그 첫번째는, 2023년에 번역 출판된, 오스트리아 학파의 창시자 중의 한사람이며 막스 베버의 정신을 계승한 프리드리히 폰 비저(Friedrich von Wieser)의 대작 “권력의 법칙”이다. 비저의 저술은, 통시적, 역사적 대서사라는 측면에서, 권력의 ‘거시론’이라고 칭하여질 수 있음에 반하여, 본서는 그 시야를 현대 자본주의의 임노동관계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권력의 미시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세번째의 저서는 1970년대에 소위 ‘권력논쟁’을 촉발시킨 바 있는 또 다른 현대판 고전인 스티븐 룩스 (Steven Lukes)의 ‘권력이란 무엇인가 - 3차원적 권력의 근본적 해부’이다. 앞의 두 저서가 각각 독일 역사학파적 시각, 프랑스 제도주의학파의 시각에서 저술되었음에 반하여, 이 세번째 저서는 영미권의 분석적 시각에서 집필된, 권력에 대한 정치철학적 분석과 실증 사례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이 세권의 저술은 상호 보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각기 독일, 프랑스, 그리고 영미권의 접근 방법을 대표하고 있으며, 동시에 거시적, 미시적, 그리고 분석적 통찰을 각기 담고 있다. 따라서 이 저서들은 그러한 의미에서 크게 상호 보완적이며, 독자들에게 권력의 문제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본서는 스피노자가 이야기한 권력과 지배의 개념에 기반을 두고, 그 위에 마르크스의 구조주의를 결합하여 현대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적 기업에서 보여지는 임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예속’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는 현대판 고전이다. 그리고, 일면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Étienne de La Boétie)의 저서 “자발적 복종”의 중심 테마를 현대 자본주의에 옮겨서 분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본서의 문제의 시발점은, “왜 현대의 신자유주의적 기업들에 근무하는 임노동자들이 고용주들에게 자신들의 ‘신체’와 ‘영혼’을 모두 바쳐 충성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자발적’으로 원하는데, 왜 제3자가 나서서 ‘착취’니 ‘소외’니 하는 거창한 말들로 그들을 해부하려 하는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였던 ‘계급의식’과 ‘혁명’은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영원히 실종된 것인가. 소위 위대한 ‘혁명의 밤’이 다시 돌아오면 그 다음 날부터는 착취와 소외는 이 세상에서 소멸하게 되는가. 로르동 교수는 스피노자와 마르크스를 결합하여 이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고 착취와 소외를 재정의하면서, 자본주의적 기업을 변혁시키는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동시에 신자유주의 기업체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아내고 있다.
스피노자에 있어서의 ‘권력’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정서’에 대한 지배이다. 무기 그 자체가 권력이 아니라, 무기에서 나오는 공포, 그리고 그 무기를 운영하는 군대에 대한 정신적 지배가 권력이고, 더욱 고차원적인 권력은 강압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하는 ‘힘’이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권력과 지배에 대한 통찰은 일찍이 프리드리히 폰 비저가 그의 “권력의 법칙”에서 말하고 있는 ‘내적 권력’, 권력에 대한 현대적 담론에 있어서 출발점이 되는 스티븐 룩스(Steven Lukes)의 권력론에 등장하는,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여 ‘순응’을 끌어내는 소위 ‘3차원적 권력’, 부르디외와 푸코의 권력론, 그리고 로르동교수의 본서에 계승되고 있다.
그렇다면 착취와 소외란 무엇인가. 통상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서 노동의 산물’인 ‘잉여가치’가 노동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게 귀속되는 것으로서의 ‘착취’, 그리고 자신의 노동의 산물로부터의 ‘소외’를 설명함에 반하여, 본서에서는 ‘착취’는 단순히 어떠한 물적 대상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피지배자가 가진, 아직 ‘방향’이 정하여지지 않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코나투스’(conatus), 즉, ‘생의 에너지’를 지배자 자신이 욕망하는 ‘방향’으로 ‘재정렬화’시키고. 그럼으로써, 지배자가 욕망하는 방향으로 피지배자가 일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말하자면, ‘소외’는 어떠한 ‘물적 대상’의 소유권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지배자의 코나투스의 방향성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여 자신의 코나투스가 지배자의 코나투스에 정렬되어짐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권력 현상을 보았을 때, 자본가와 임노동자의 관계를 어떠한 ‘물적인 대상’을 둘러싼 투쟁으로 보는 종래의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을 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스피노자적 시각에 근거할 때, 현대 자본주의에서 보여지는 현상들, 즉, ‘합의’’에 의한 ‘자발적’ 노동이 설명될 수 있다. 피지배자가 지배자의 코나투스의 방향성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피지배자가 ‘주인’을 위하여 일하면서 ‘슬픔’이 아닌 ‘기쁨’의 ‘정념’을 느낄 수 있고 그의 노동은 ‘합의’에 의한 것임을 의미한다. 즉, 스스로 착취되고 있다거나, 혹은 소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위 ‘자발적 예속’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의 아포리아로 남아 있는, 임노동자들 특히 중간관리자들이 이제는 자본의 편에 서서 자본을 위해 봉사하게 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렇다면 이렇듯 새롭게 해석된 착취와 소외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답은 다분히 열려 있다. 로르동 교수는 진정한 해방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우선적으로 과거 혁명의 ‘위대한 밤’이라는 낭만성에서 탈피하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한 낭만적 혁명의 밤에 뒤이어 찾아온 것이 결국 로베스피에르와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아니었던가. 저자에 의하면 그러한 혁명의 밤 뒤에도 지배와 피지배는 엄연히 존재하며, 그러한 관계가 혁명 후에는 완전히 종식되는 것을 기대한 것이 마르크스가 범한 가장 큰 인류학적 오류이다. 본문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한 가지 방안인, 구성원들 모두의 공평한 권력 배분, 결정 그리고 그에 의하여 공동의 목표로 향하여 가는 형태의 ‘공동결사기업’이라는 형태도 결국 궁극적인 답은 제시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직 내에서조차 저자가 말하는 소위 ‘정념의 착취’는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올바른 이성에 의 하여 인도될 수 있는 사회는 어찌 보면 비현실적인 환상이다.
하지만 다중이 궁극적인 자기 결정성을 가진다는 목표는, 그것이 아 무리 완전하게 도달할 수 없는 목표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지시한다는 면에서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며 그러한 목표가 있음으로써 우리는 보다 ‘자기 결정적’인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다. 로르동 교 수의 이같은 이야기는 어떠한 절대적인 기준을 바라는 독자들, 또 다른 혁명의 밤을 기대하는 독자들을 실망시킬 수 있다. 하지만, 재차 강조하지만 낭만적인 혁명의 환상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본서는 권력의 거시론이라는 측면에서의 폰 비저의 ‘권력의 법칙’에서 말하고자 한 메시지와 밀접히 연결된다. 비저는 대중의 ‘도야(陶冶)’가 진정한 민주주의로 향하는 가장 중요한 시금석이라고 강조하였고, 그렇지 못한 경우 민주주의를 가장한 또 다른 형태의 지배-피지배 관계인 파시즘 혹은 우연히 등장한 우민 선동정치가의 먹이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한 바 있다. 또한 비저는 대중의 도야에 근거할 때만 비로소 어느 조직이건 상존할 수밖에 없는 지배자들의 권력 남용을 견제할 수 있고 그럼으로 써 진정한 민주주의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설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그리하여 비저의 결론과 로르동 교수의 결론은 서로 일맥상통한다. 그런 데 비저가 말하는 대중의 도야, 그리고 로르동이 이야기한 진정한 이성에 의하여 인도되는 사회로 향하는 길은 사실 멀고도 험난한 여정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우리가 걷는 한 발 자국은 또 다른 길로 인도하고 그러다 보면 멀게만 보이던 산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설 수도 있다.
참고로, 본서에서 나온 주요 테마는, 저명 극작가인 Judith Bernard에 의하여 Bienvenue dans l’Angle Α (알파각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는 제목으로 연극무대에 올려진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