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환시는 신의 참된 계시일까, 아니면 악마의 유혹일까.” _김이삭(소설가)
“시와 복수로 지어진 여성들과 유령들의 집.” _마리아나 엔리케스(소설가)
“독특하게 기이하며 음산하고 소름 끼치는 이야기” _〈뉴욕타임스〉
“모든 침대 밑에는 죽은 이들이 살고 있어.”
원한 서린 저주의 집, 역사와 환상을 엮은 괴담
문턱을 넘어섰을 때, 집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여기 수북이 쌓인 벽돌 더미와 잡동사니들도 늘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누구든 문을 통과하기만 하면 덤벼들어 숨을 쉬지 못할 때까지 속을 뒤틀어놓는다. (…) 여기에 살다 보면 이와 머리카락이 자꾸 빠지고 살도 쑥 빠진다. 그리고 평소 조심하지 않으면 집 안을 이리저리 기어다니거나, 침대에 누워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 _9쪽
스페인 산골의 황량한 벌판에 고립된 집.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이곳에는 신비한 힘을 지닌 할머니와 손녀가 살아간다. “어둠의 그림자들”로 불리는 죽은 자들의 망령으로 득실거리는 집에는 오래 전승된 저주가 있다. 남자들은 전부 속이 말라 죽어버리고 여자들은 결코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는 것. 오래전 포주였던 증조부가 여자들을 “등쳐먹”어 번 돈으로 지은 집은 억울한 혼들이 깃든 거대한 몸이자, 지난 전쟁의 참혹한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무덤이다.
나는 이 집에 도사리는 어둠의 그림자들도 볼 수 있다. 그것들은 계단과 복도를 기어다니다 천장으로 기어 올라가는가 하면 문 뒤에 숨어서 밖을 엿보기도 한다. 이 집은 그런 것들로 바글바글하다. _40쪽
이곳에 오랜 세월 살아온 할머니와 손녀는 교대로 화자가 되어 집에 얽힌 비밀을 들려준다. 그들은 이 집에 살아온 4대 가족의 삶, 대대로 마을의 권력자 가문의 하녀로 일해오며 직면한 계급 장벽, 타인을 향한 혐오와 배척, 강자들의 비겁함,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아우르는 스페인의 역사적 비극을 증언함으로써 고통과 증오, 피로 얼룩진 현대사의 섬뜩한 이면을 드러낸다. “집이라는 공간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폭력이 있어온 곳이며, 공포는 결코 해소되지 않는 집단 트라우마를 다루는 데 유용하다”는 칠레 언론 〈라테르세라〉와의 인터뷰 속 저자의 말처럼, 공포와 미스터리 장르를 적극 차용해 스페인의 한 가족사를 담아낸 서사는 “모든 가족의 침대 밑에는 죽은 이들이 살고 있”음을 일깨우며, 현대사회가 그 무수한 죽음을 망각함으로써 유지된다는 진실을 스산히 환기한다.
“깨어나서 보니 내 안에 나무좀이 들어가 있었다.”
우리를 파괴하고 좀먹는 것들을 향한 복수
모든 걸 이해하게 된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있던 내 머릿속에 모든 것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 혐오감은 우리 내면으로 들어와 우리를 독으로 물들이고 마음속 깊이 자리 잡는다. 결국 우리는 혐오감이 아예 우리의 것이라고-사실은 그렇지 않지만-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러다 나는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서 보니 내 안에 나무좀이 들어가 있었다. _147~148쪽
소설의 제목인 ‘나무좀’은 집안 여성들이 대대로 시달리는 가려움증, 마치 몸속에 나무좀이 기어다니는 듯한 증상을 의미한다. 이는 외부의 공포와 증오가 내면에 깊게 전이되어 나타난 고통의 신체적 표현이다. 그러나 할머니와 손녀는 자신을 좀먹는 것들의 힘을 역이용해 복수를 감행한다. 그들은 몸속에 스며든 원한을 무기 삼아, “작은 숟가락 하나로 쉬지 않고 구덩이를 파는 것처럼 조금씩 그러나 끊임없이 계속 여자들을 파괴하는” 것들을 향해 저주를 내린다. 원망의 불길에 휩싸여 악을 쓰고 비명을 지르며 거침없이 울분을 토해내는 말들은 저주의 주문이 된다. 이러한 복수심의 폭발은 단순한 분노의 표출을 넘어, “권력과 폭력에 의해 언어에서 배제된 것들, 즉 육체가 없는 유령처럼 사람들의 무의식에 떠돌거나 망각의 늪 속에 가라앉은 것들”을 해방하려는 저항적 힘으로 발전한다.
“유령들은 아직도 정의의 실현을 기다리며 출몰하고 있다”
소설만이 이룰 수 있는 독특한 정의의 건축물
“오늘날 우리는 죽은 자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아마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는 은유가 없다. 망자와 유령은 닫히지 않은 상처이자 트라우마로서 존재한다. 스페인에서는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 복수는 주인공들이 정의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당신에게 힘도 없고 목소리도 없을 때, 박해와 탄압을 받으며 기댈 수 있는 공식적인 정의조차 없을 때 불의와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 남는 것은 복수뿐이다. 책에 나오는 주문과 저주도 그 복수의 일부다. 그들이 경험하는 불의와 억압을 처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_저자 인터뷰 중에서
저자 라일라 마르티네스는 《나무좀》을 통해 억압받는 자들이 운명을 거슬러 가져본 적 없는 정의를 이뤄낼 복수의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고 말한다. “미래의 언어로 말하는 미친 여자”들과 유령들이 한 몸이 되어 폭력에 맞서는 집은 억눌린 감정과 봉합되지 않은 트라우마를 해방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공간으로 살아 숨 쉰다. 더 나아가 공적 역사에서 지워진 자들이 자신만의 언어를 되찾고 새로운 세계를 꿈꿀 수 있는 유토피아를 보여준다. 그렇게 《나무좀》은 소설만이 이룰 수 있는 독특한 정의를 실현하며, 폭력적 지형으로 기울어진 세계에 맞서 싸우는 강렬하고 아름다운 복수극을 선사한다.
광기-미친 여자의 이야기는 결국 국가권력과 현실 정치 논리의 이면에 드러나는 순수한 여성성의 세계, 혹은 여성성에 기초한 새로운 공동체의 전조가 아닐까. 그렇다면 할머니와 손녀, 더 나아가 라일라 마르티네스와 《나무좀》은 현실의 논리에 포섭되기를 저항하며 또 다른 세계를 꿈꾸는 셰에라자드가 아닐까. _〈옮긴이의 말〉 중에서